소설은 그 목적이 사회 고발적이거나 계몽적인 것이 전혀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는 그 시대 사회상이 묻어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배경에서 드러나는 것들은 물론이요 시공 배경이 현재가 아닐지라도 쓰는 사람에게 베어있는 가치관과 현대적 사고방식이 글에 드러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면에서 이 이야기는 많은 현실들을 떠올리게 한다. 현대에서 가장 기묘한 권력 관계중 하나인 ‘지도교수-대학원생’의 관계는, 그 설정만으로도 인분교수나 스캔노예, 사제 폭탄테러범을 연상시킨다. 초반 등장하는 교수의 질책과 그것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나’의 태도는 이러한 현실세계의 몇몇 사건과 연결되고 그에 따라 이야기를 읽어갈수록 점점 기묘한 불안감을 형성해간다.
적립되듯 차곡차곡 쌓여가는 불안감은 최근에 일어났다는 사망 사건과 고립된 장소, 끝없이 들이차는 물 등으로 더욱 구체화된다. 당장 생존의 위협을 느껴도 모자람이 없는 상황에서 지극히 비상식적인 교수의 태도는 그런 공포감을 배가시킨다. 그는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상황에서도 그런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가?
그러나 조금 더 들어가보면, 교수는 발밑에 차오르는 물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도하던 학생의 죽음과 그에 따른 사회적 비난, 성과에 대한 압박, 동력을 잃은 연구와 다가오는 기한. 그 모든 것들은 물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교수를 압박해 들어오고 있다.
서로가 자기만의 무게에 허덕이면서도 교수는 필사적으로 탈출구를 찾고, 주인공은 교수가 내민 동앗줄을 잡으려 애쓴다. 이런 그들의 노력은 어찌나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지, 그들은 당장 코앞의 관심사 외엔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듣지 못한다. 지축을 흔드는 빗소리도, 굵은 빗줄기도, 바닥에 들이차는 물도. 심지어 열려있는 창문도.
8년을 교수밑에서 연구실을 들락거렸다는 주인공은 물론이고, 그보다 오랜시간 거기 기거했을 것임이 틀림없는 교수조차 그 창문의 존재를 몰랐다는 것은 매우 상징적이고 암시적이다. 누구보다 많이 공부하고 많이 연구하며 두뇌를 활용했을 그들은 그러나 작디 작은 자기들 연구실도 제대로 보지 못한다. 그들의 시야가, 넓은 곳을 두루 보기보단 좁은 곳을 깊게 보도록 고도로 훈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학원생이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일 것이다. 남들은 관심도 없고 쉽게 이해할 수도 없는 어떤 것을 고도로 전문적으로 파고드는 것.
그 세상은 너무나도 좁고 깊어서 사람들이 수평으로 설 자리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수직적으로 쌓이고 위에서 끌어주지 않으면 위로 나아갈 수가 없다. 그리고 좁디 좁은 세상을 구성하는 그 문제들에 푹 빠져 다른 것들은 잊어간다. 많은 것을 잊어간다. 문제보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도, 내 아래 서 있는 이가 사람이라는 것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도.
그러므로 주인공이 마지막에 논문을 걱정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그는 여전히 그 좁은 곳 아래에 있으므로. 그가 보는 세상은, 밖의 우리와는 꽤나 다를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