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반만년 역사에서 자기 이름을 온전히 남긴 여성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이 땅에 살다 간 여성이 비단 신사임당만은 아닐진대 셀 수도 없이 많은, 이름 없이 역사에 묻힌 그 여성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외자혈손전>은 고전 소설의 형식을 빌려 가부장제 속에서 실종되어버린 여성들의 행방을 풍부한 상상력으로 되짚어본다.
<외자혈손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소설의 첫머리에 인용한 <홍길동전>의 한 대목이다. 이 장치는 <외자혈손전>이 일정 부분 <홍길동전>을 패러디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동시에 독자로 하여금 <홍길동전>과의 차별성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1
작가의 안배에 따라 독자가 처음으로 마주하는 <외자혈손전>의 흥미로운 차별성은 그 이름에 있다. 무명의 ‘이름 없음’은 <외자혈손전>이 <홍길동전>에서 한발 더 나아가 여성 억압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홍길동’과 ‘무명’은 둘 다 얼자의 설움을 가지고 있지만 남성인 홍길동에겐 이름이 있고, 무명에겐 없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를 보면 보다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마녀에게 이름을 빼앗긴 치히로가 스스로가 누구였는지 잊게 되는 장면을 떠올려보시라. 이름은 타인과 나를 구별 짓는 정체성을 의미한다. 홍길동이 입신양명을 꿈꾼 것도 세상에 ‘이름’을 알림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함이 아니던가.
그러나 <외자혈손전>의 대감과 오라버니들은 무명에게 이름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들이 무명에게 허락한 정체성은 누군가의 아내 혹은 누군가의 어미라는 이름 없는 삶 뿐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무명’의 이름은 가부장제에서 자기 자신으로서 살아가지 못한 여성들 모두의 이름으로 화한다. <외자혈손전>은 <홍길동전>처럼 주인공의 이름을 전면에 드러내는 대신 이름 없는 여성들을 보듬을 수 있는 ‘외자혈손’을 제목을 선택함으로서 이 작품의 정체성을 강화해나간다.
그런가 하면 <홍길동전>과 <외자혈손전>의 차이는 배움에 대한 부친의 반응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홍길동의 부친은 자신의 얼자에게 입신양명의 기회를 주진 않았으나 그 총명함을 귀여워하고 재주를 아까워한다. 하지만 무명의 부친 ‘대감’의 반응은 어떻던가? 애초에 배울 기회조차 주지 않은 것은 물론 무명이 글을 익혔음이 드러나자 ‘불효’라며 호통치길 망설이지 않는다. 왜 이토록 홍길동의 부친과 대감의 반응은 상반되는 것일까. 그것은 무명의 배움과 재주가 대감의 기득권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외자혈손전>은 가부장제 대표인 ‘대감’의 부유함을 피비린내 나는 육류를 통해 보여준다. 그것은 납치혼에서도 드러나듯, 가부장제가 타자의 희생을 거름삼아 번영해 왔음을 의미한다.
대감이 귀애하던 첩을 살해한 것도 그 때문이다. 착취 대상이었던 첩이 강력한 이무기였으며, 그녀가 대감의 덫을 해체했다는 것은 대감이 누려왔던 기득권에 대한 위협이기 때문이다. 대감이 첩을 죽여 술로 담가 먹은 것은 전복의 시도에 대한 응징이자 다시 여성을 타자의 존재로 격하시키기 위한 일종의 의식이나 다름없다. 대감이 무명의 배움과 재주를 경계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여성의 배움이야말로 가부장제의 부조리함을 인식하고 반항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이기에.
그러나 살해당한 첩은 외자혈손인 ‘무명’을 통해 귀환한다. 이 지점이 <외자혈손전>의 진가가 발휘되는 부분이다. 단 한 번도 대감에게 ‘친자혈손’으로 여겨지지 못했던 무명은 오롯한 어머니의 후계자로서 복수를 유산으로 계승하는 것이다. 만약 대감이 무명을 ‘친자혈손’처럼 여겨주었다면, 그녀에게 이름을 주고 강제로 혼인시키려 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수상쩍은 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도, 그래서 선악과와 같은 잔인한 진실을 목도하고 이무기로서 각성할 일도 없지 않았을까? 따라서 이것은 대감이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다. 억압된 타자의 귀환은 누군가에게는 공포지만 누군가에게는 카타르시스로 다가오는 법.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무명이 혼인식에서 이무기로 화하는 장면은 가부장제가 규정지었던 여성상을 탈피하고 전복하는 명장면이다. 무명이 친자혈손을 씹어먹는 광경은 그로테스크 하지만 무명과 함께 이 이야기를 읽어내렸던 독자들에게 묘한 흥분감과 통쾌함을 전해준다.
이러한 <외자혈손전>의 결말부는 <홍길동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지점이다. 홍길동 역시 얼자를 인정해 주지 않는 경직된 사회를 떠나 율도국의 왕이 된다는 점에서 전복적이지만, 그는 자신을 잡으려 드는 아버지와 왕을 원망하거나 복수하려 들지 않는다. 특히 그가 율도국의 왕이 되어 두 명의 부인을 두었다는 부분은 체제를 전복하는 대신 승자로서 편입되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한다. 반면 <외자혈손전>은 가부장제 체제에 편입되기를 꾀하는 대신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부셔버렸다는 점에서 진정한 전복을 달성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거세되었던 태초의 힘을 되찾고 이무기로 돌아간 무명이 행복해 보였다는 후일담은 통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잔잔한 슬픔을 남기는데, 그것은 이 작품이 아직 도래하지 않은 평등한 사회에 대한 열망이자, 이미 가부장제 속에서 실종되어버린 여성들에게 보내는 다정한 애도이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