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이 실종된 여성들을 위한 호러 의뢰(비평) 브릿G추천 이달의리뷰

대상작품: 외자혈손전(外者血孫傳) (작가: 리리브, 작품정보)
리뷰어: 김시인, 23년 3월, 조회 131

 

우리나라의 반만년 역사에서 자기 이름을 온전히 남긴 여성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이 땅에 살다 간 여성이 비단 신사임당만은 아닐진대 셀 수도 없이 많은, 이름 없이 역사에 묻힌 그 여성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외자혈손전>은 고전 소설의 형식을 빌려 가부장제 속에서 실종되어버린 여성들의 행방을 풍부한 상상력으로 되짚어본다.

<외자혈손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소설의 첫머리에 인용한 <홍길동전>의 한 대목이다. 이 장치는 <외자혈손전>이 일정 부분 <홍길동전>을 패러디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동시에 독자로 하여금 <홍길동전>과의 차별성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작가의 안배에 따라 독자가 처음으로 마주하는 <외자혈손전>의 흥미로운 차별성은 그 이름에 있다. 무명의 ‘이름 없음’은 <외자혈손전>이 <홍길동전>에서 한발 더 나아가 여성 억압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홍길동’과 ‘무명’은 둘 다 얼자의 설움을 가지고 있지만 남성인 홍길동에겐 이름이 있고, 무명에겐 없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를 보면 보다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마녀에게 이름을 빼앗긴 치히로가 스스로가 누구였는지 잊게 되는 장면을 떠올려보시라. 이름은 타인과 나를 구별 짓는 정체성을 의미한다. 홍길동이 입신양명을 꿈꾼 것도 세상에 ‘이름’을 알림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함이 아니던가.

그러나 <외자혈손전>의 대감과 오라버니들은 무명에게 이름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들이 무명에게 허락한 정체성은 누군가의 아내 혹은 누군가의 어미라는 이름 없는 삶 뿐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무명’의 이름은 가부장제에서 자기 자신으로서 살아가지 못한 여성들 모두의 이름으로 화한다. <외자혈손전>은 <홍길동전>처럼 주인공의 이름을 전면에 드러내는 대신 이름 없는 여성들을 보듬을 수 있는 ‘외자혈손’을 제목을 선택함으로서 이 작품의 정체성을 강화해나간다.

그런가 하면 <홍길동전>과 <외자혈손전>의 차이는 배움에 대한 부친의 반응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홍길동의 부친은 자신의 얼자에게 입신양명의 기회를 주진 않았으나 그 총명함을 귀여워하고 재주를 아까워한다. 하지만 무명의 부친 ‘대감’의 반응은 어떻던가? 애초에 배울 기회조차 주지 않은 것은 물론 무명이 글을 익혔음이 드러나자 ‘불효’라며 호통치길 망설이지 않는다. 왜 이토록 홍길동의 부친과 대감의 반응은 상반되는 것일까. 그것은 무명의 배움과 재주가 대감의 기득권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외자혈손전>은 가부장제 대표인 ‘대감’의 부유함을 피비린내 나는 육류를 통해 보여준다. 그것은 납치혼에서도 드러나듯, 가부장제가 타자의 희생을 거름삼아 번영해 왔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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