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당히 각이 잡힌 분위기의 글이다. 있을 것은 다 있고 없을 것은 또 없는, 그야말로 화개장터 같은 글인데, 그만큼 형식에 구애받는 듯한 모습이 ‘전형적’이라는 감상을 낳는다. 특별히 모난 데 없이 술술 읽히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호러 장르, 특히 오컬트 마니아라면 수도 없이 접해봤을 법한 이야기 공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 역시 분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작품은 길치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앞에 서서 무리를 이끌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의 영석이 가족들을 태우고 시골집을 향해 호기롭게 차를 몰다가 보기 좋게 길을 헤매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정상 작동되는 내비게이션 하나 구비해놓지 못하는 주제에 옆에서 길 안내를 하던 애꿎은 아내 수향에게 “이게 다 니가 지도를 똑바로 못 봐서 그런 거야”라며 투덜댈 줄만 아는 남편 영석은 도대체 운전을 어떻게 하는 건지 멀쩡히 가다 말고 웬 철조망이 길을 막는 낭떠러지 옆에 도착한다.
철조망 너머는 사유지라 들어가지 못한다는 문지기의 말에 무심히 차창을 닫으려는 영석 대신, 수향은 황급히 하룻밤 신세를 질 수 있을지 문지기에게 묻는다. 길치인 데다 눈치도 없는 영석은 아내에게 인상을 찡그리지만, 수향은 차량 계기판을 가리키며 이 이상 헤매고 다니다가는 차가 길 한복판에서 퍼져버릴 것임을 넌지지 알려준다.
결국 영석과 그 가족은 그날 밤을 그곳에서 보내게 된다. 외진 시골 산 중턱에 어울리지 않는 으리으리한 저택이 있고, 음침한 분위기의 가정부가 나와서 가족들을 안내한다. 왠지 모를 께름칙한 분위기에 긴장하면서도 그들은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가정부의 안내에 이끌려 들어간 방에서 얌전히 잠을 청하는데, 그날 밤 목이 말라 눈을 뜬 영석이 물을 마시러 방을 나갔다가 도깨비불 같은 것을 보고 그만 혼절하고 만다.
다음 날 발견된 영석이 몸져눕자 자연히 그들은 저택에 발이 묶이게 된다. 점심을 대접받으며 수향은 마침내 저택의 주인인 ‘주병하’를 만나는데, 족히 아흔은 돼 보이는 얼굴에 비해 웬만한 중년 못지않은 다부진 체격을 지닌 그의 풍채에 그녀는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하룻밤을 재워주고 끼니까지 챙겨주는 집주인에게 성의를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식사를 하는 내내 그녀는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열심히 맞장구를 치고, 남편인 영석의 성(姓)이 무어냐는 질문에 숨김 없이 “뿌리 주(株) 자를 쓰고 본관은 ●●”이라고 답한다.
그러자 단순히 성이 같다는 이유만으로는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주병하는 영석에게 부쩍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고, 의아함을 애써 감추며 수향이 그를 감당해 내는 사이, 딸인 다혜는 혼자 밖으로 나갔다가 나무로 된 낡은 창고 하나를 발견한다. 외벽에 난 개구멍을 통해 창고 안으로 들어가는 다혜. 음습한 분위기에 겁이 나서 도로 나가려다 문득 손에 잡히는 게 있어 잡아당겨 보니 다름 아닌 사람의 해골이다. 깜짝 놀란 다혜의 비명 소리에 누군가 창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집주인인 주병하 본인이고,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으로 밝아진 창고 안에는 해골무더기와 붉은 글씨, 다 타서 녹아버린 양초 따위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길을 잃고 헤매는 주인공과 낯선 장소. 그곳에 사는 수상한 사람들과 그들이 베푸는 수상한 선의. 그리고 하나둘씩 드러나는 숨겨진 진실…… 수없이 반복되어 온 공식이기는 해도 그만큼 독자와 관중을 사로잡을 수 있는 마력을 지닌 플롯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별도의 특색을 갖추지 못한다면, 틀에 갇혀 버리고 예상 가능한 이야기만을 되풀이하게 되는 위험이 있어 매우 주의하여 다뤄야 하는 것이 바로 이 ‘클리셰’란 녀석이다.
당장 떠오르는 괴담이나 호러 무비 등이 몇 가지 있는데, 아무래도 가장 최근에 본 작품을 언급하는 게 낫겠다. 마크 톤더레이 감독의 『스펠』이라는 영화가 있는데, 전반적인 설정 및 전개가 유사하다. 사유지의 처리와 유산 상속의 문제로, 죽은 아버지가 혼자 살던 마을을 찾아가던 아들과 그의 가족들이 의문의 사고를 당하게 된다. 정신을 차린 아들의 몸은 낯선 방 안, 낯선 침대에 묶여 있고, 그의 앞에 나타난 낯선 노부부는 친절한 치료사 행세를 하지만, 실은 그의 건강한 육신을 탐내는 검은 속내를 감춘 부두술사들이다. 이 영화 역시 전형적인 이야기 공식을 따르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촬영기법, 인물들의 성격이나 전사를 드러내는 방식 등에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고, 특히 부두술이라는 특징적인 소재를 통해 차별화를 모색하고 있어 보는 재미를 더한다.
미타의 소설 「귀성」 역시 무능력하면서도 아내를 무시하는 남편 영석과 상황 판단이 빠르고 침착한 성격의 아내 수향 등 인물관계의 모식도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며 독자에게 술술 읽히는 재미를 제공한다. 비록 악마 숭배나 주술을 통한 영생 등의 오컬트적 소재가 진부해 보이는 수준을 넘어서지는 못했으나, 한 가지 독특한 설정이 눈에 띄는 점도 작품을 완독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영혼의 이월을 통해 300년 넘는 세월 동안 살아온 주병하에게 갖은 속박과 착취를 당해 온 수많은 아내와 딸들이 수십의 원귀가 되어 저택을 떠돌고 있다는 설정은 이 작품이 다른 작품과 비견될 때 가장 두드러지는 차별점으로 언급될 만하다. 이들 영혼의 주인들이 별다른 이름도 없이 그저 ‘주병하의 아내’, ‘주병하의 딸’이라는 묘패만을 지닌 채 공동묘지에 묻혀 있다는 설정 역시 주제 의식을 암시하며 작품에 흥미를 더한다.
“여자들도 이름이 있을 텐데 왜 제대로 된 이름 대신 누군가의 아내와 딸로 기록된 것일까.”
상기한 설정이 보다 깊이 있게 다뤄졌더라면 작품의 특징이 두드러지면서 차별화를 이뤘을 테지만, 그러지 못하면서 아쉽게도 빛을 바라는 모습이다. 여기에 더해 가정부가 대뜸 조력자로 돌변한다는 전개는 별다른 복선을 앞서 제시하지 못함으로써 전체적인 개연성과 재미를 떨어뜨리는 악수가 되고 만다. 결국 작품 초반부터 똑부러지는 모습을 보이면서 뭔가 한 건 할 것처럼 보였던 주인공 수향은 끝내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난데없이 조력자가 된 미진의 힘으로 사건이 마무리되며 다소 힘이 빠지는 결말을 보여준다.
그러나 클리셰를 벗어날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한 것은 결코 아니기에, 작품의 완성도에 치중하기보다 뭔가 색다른 시도, 틀을 깨보려는 노력을 중심에 두었다면 아마도 다른 양상이 나타났을 듯하다. 그래서 아쉽고, 또 그래서 다음 작품이 궁금해진다. 물론 기승전결을 갖춘 한 편의 이야기에 구색을 갖춰 결말을 짓고, 그 안에서 보다 발전할 가능성까지 보여주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더욱 글쓴이의 성장을 위한 조언이 담긴 리뷰를 바란다는 작가의 코멘트에 고무되어 일천한 필력으로나마 온갖 아는체를 다 하며 다소 비판적인 리뷰를 남기게 됐다.
“이 작품은 이 정도까지 읽히지만, 더 나아갈 수 있다.”
한 사람의 독자로서 작가의 변화를 지켜본다는 것은 무척 흥미롭고 감동적인 일이다. 작가의 다음 작품을 진심으로 기대하고 응원하며, 이쯤에서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