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이기는 하지만, 다 읽고 난 뒤의 감상은 곧 펼쳐질 장대한 서사시를 예고하는 한 편의 트레일러를 보고 난 뒤의 느낌과 같다. 짧은 분량 속에서 작품의 뼈대가 될 만한 주요 소재들, 종족 간 관계, 인물 등을 다소 투박하고 거칠긴 해도 핵심 내용에 포커스를 맞추는 방식으로 간결하고 흥미롭게 소개하고 있다.
도깨비 나라에 날아든 기러기 떼가 전하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로 작품은 시작된다.
“도깨비 공주는 몸은 도깨비지만 마음은 인간이래요, 인간 무사는 몸은 인간이지만 마음은 도깨비래요. 둘의 마음은 붉은 실로 단단히 매여 있대요. 손목에 붉은 실. 두려워하라, 도깨비야. 두려워하라, 김 서방. 공주와 무사의 운명은 너희들의 피와 염(炎)으로 붉으니. 무서워라, 무서워라. 붉은 실이 진정으로 이어져 하나 될 때, 삼라만상이 붉게, 붉게 된단다.”
붉은 실의 인연으로 묶인 도깨비 공주와 인간 무사가 만나 하나가 될 때, 삼라만상이 붉게 물들 것이라는 흉설이 온 세상에 퍼지자, 도깨비 나라와 인간 제국에서는 만반의 대비를 갖추기로 한다. 두 세계에서 만일 손목에 붉은 표식을 지니고 태어나는 자가 있다면, 평생을 감시하에 두어 서로 반드시 만나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세계의 맹약이 천 년의 세월 동안 이어져 온 끝에, 마침내 붉은 빛의 반점을 손목에 띠처럼 두른 여자 아이와 손목에 붉은 흉터를 지닌 사내 아이가 각각 도깨비 나라와 인간 제국에서 태어난다.
재앙의 화근인 두 아이를 죽여야 마땅하다는 의견이 제시되지만, 천 년의 세월 동안 근거 없이 떠도는 전설이 지니는 영향력은 그새 많이 퇴색된 상태다. 그저 낭설일지도 모르는 이야기만 믿고서 아이들을, 그것도 도깨비 공주와 제국의 재상가 자제를 해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도깨비 나라를 다스리는 도깨비 어르신은 공주를 ‘명계’라 불리는 세상에서 가장 깊숙한 장소에 숨기기로 한다. 인간 제국의 재상은 아이가 자라 무예를 익히자, 무관으로 기용해 변방을 지키도록 명령한다.
‘평’이라는 이름의 그는 변방에 부임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북방의 오랑캐를 멸절시키는데, 무예 실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뿐만 아니라, 적군과 포로를 다루는 방식이 잔악하기 그지없어, 부하들에게는 인간의 탈을 쓴 괴물처럼 여겨진다. 한편 명계에 갇힌 도깨비 공주의 이름은 ‘화’로, 술법에 능한 혈통을 타고났으나 요력을 다룰 수 없다는 사실에 콤플렉스를 느끼고 있다.
그녀가 요술을 부리지 못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그녀가 도깨비의 몸으로 인간의 마음을 지니고 태어난 운명의 아이이기 때문이다. 이를 역린처럼 여기는 그녀는 남의 입에 이 사실이 오르내릴 때마다 날을 세우는 모습을 보이는데, 운명에 곧이곧대로 순응하지 못하는 성격을 보여주는 태도라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녀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신기를 사용해 도깨비 어르신 몰래 명계를 빠져나가기도 하는 대범함을 보여줌으로써 운명과 법도에 그저 수동적으로 따르기만 하는 인물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무관이 된 평 역시 타고난 운명에 따라 인간의 몸에 도깨비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 그가 지닌 도깨비의 마음은 적을 대할 때 나타나는 흉폭함과 비정함으로 형상화되는데, 불교에서 말하는 야차와 같은 모습으로 단죄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모질고 사나워질 수 있는 캐릭터성을 드러내고 있다.
“적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고 철저하고 잔혹하게 격멸하는 모습을 보며 적, 아군 할 것 없이 도깨비라 부르며 평을 두려워하였다. 인간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지만, 마음은 잔혹한 도깨비라고.”
그는 자신을 향한 주변의 이목이나 평가에는 아랑곳 없이 오직 눈앞에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고 싸움에서 승리하는 데만 혈안이 된 사람처럼 보인다. 그를 위해 그는 인간이 아닌 미물에 마음을 줘선 안 된다 말하며, 같은 인간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이해에서 어긋난 자라면 인간으로서 바라보기를 가차없이 포기해 버린다. 그의 이런 속세에 무관심하고 무정한 태도는 운명에 대한 순응이라기보다 오히려 ‘초연’에 가까운 경지에 이르렀다는 인상을 자아낸다.
운명에 저항하고자 하는 아이와 운명을 달관해 버리게 된 아이의 만남과 그 뒤로의 이야기는 과연 어떻게 될까?
전체적으로 붉은 실의 인연이라는 전설, 도깨비, 명계 등의 신화나 민담 등에서 발견할 수 있는 소재가 무협풍의 스토리에 잘 녹아든 세계관이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작품이다. 오랑캐 우두머리인 ‘설표’와 평이 벌이는 한바탕 액션씬은 너무 유치하지도, 또 너무 고리타분하지도 않은 수준에서 담백하게 묘사된다. 가장 흥미로운 설정은 주인공 평의 캐릭터이다. 그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눈앞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피도 눈물도 없이 상대를 도륙해 버릴 수 있는 실로 ‘괴물’ 같은 인물이다. 목적에 비해 생명을 경시하는 태도에서 어쩌면 ‘악’으로 규정할 수도 있는 이 캐릭터는 닭 한 마리조차 죽이지 못하는 도깨비 공주 화에 대비되며 그 극악함이 더욱 강조되는데, 이후 그녀가 자신의 운명의 상대임을 알아본 그가 폭주하는 대목에서 그의 캐릭터성에 어떤 변주가 일어나는 양상을 지켜보는 재미가 있다.
이 같은 캐릭터성의 변주는 화에게서도 나타나는데,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닭을 살려보내려 할 만큼 순해 빠진 그녀가 살육을 벌이는 평의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보고도 그의 손목에 나타난 표징을 발견한 뒤로는 운명의 도래를 기다리며 두근거려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이렇듯 두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송두리째 바꿔 놓은 운명이란 과연 무엇일까. 운명의 강력한 이끌림 앞에서 그들이 각자의 신념과 가치관을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지, 어떤 선택을 해 나갈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2020년 11월, 단문응원을 통해 계속 이어서 쓸 것인지 궁금하다는 독자의 질문에 작가가 직접 “단편으로 끝입니다”라고 답글을 다는 것으로 이 작품의 결말 뒤에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는 잠정적으로 알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무협 장르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제법 쓸만해 보이는 무협풍 이야기를 읽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작가가 품고 있을, 혹은 지금 한창 쓰여지고 있을 다른 이야기가 있다면 응원의 한마디를 전하고자 이 리뷰를 작성해본다.
여기, 당신의 글을 궁금해하며 기다리고 있는 독자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