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가난이 어느 때보다 보편적인 시대에 살고 있다. 물질과 정신이 풍족하지 못한 현대사회에서 빠르게 양산되고 있는 건 ‘가난’의 마음가짐이다. 모두가 스스로 가난하게 여긴다. 누군가는 타인보다 넉넉하지 못하므로 자신이 가난하다고 말하고, 만족하지 못한 삶에 가난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하지만 그 보편의 가난 속, 이제는 ‘진짜 가난’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는 소외가 있다. 섣불리 말했다가는 ‘그렇고 그런 사람’ 취급을 받는, ‘너와 내가 같은 고통을 통과하고 있다’는 핀잔을 들어야 하는 ‘진짜 가난’ 속의 사람들이 있다. 가난을 오랜 시간, 깊이 경험한 사람은 신체와 정신 상의 한계를 겪는다. 그들은 가난을 부끄럽게 생각한 적 없지만, 세상은 경제적 소외계층에게 은밀한 수치심을 지속적으로 심는다. 부유한 이들이 복지 사각지대와 차별이라는 단어를 빼앗아 간 지금, 가난한 사람들에게 남은 건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일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도망을 시도한다. 그러나 사회의 견고한 구조가 낳은 가난에서 개인이 탈출하기는 쉽지 않다. 그들의 도피는 불가능의 수준에 다다랐다. 다수가 애써 피하는 시선 끝에는 내일 먹을 밥이 없는 사람들과 병원비 몇천 원이 없어 오롯이 고통을 홀로 감내하는 사람들이 ‘정말 존재하겠어?’라는 질문으로 꽁꽁 감춰져 있다. 이동건 작가의 소설 <준>은 그런 사람 중 하나를 조명한다. “가난 가출하는 누군가의 이야기”. 짤막한 작품 소개는 서술자 ‘나’가 ‘가난’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탈출을 시도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청소년 시기의 학생들이 겪는 가난은, 그들의 사회 생활이 법적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더 크게 다가온다. 보호자들의 가난은 자녀에게 대물림되곤 한다. 그것을 알고 있는 청소년들은 때로 극심한 두려움을 느낀다. 그들이 가난에서 어떻게든 탈출하려는 시도는 종종 ‘가출’의 형태로 드러나기도 한다. 주인공이 “집 앞에 도착”한 것으로 시작해 “집을 나온”것으로 끝을 맺는 이 소설은 그가 집에서 보낸 마지막 하루의 시간을 그린다.
그것은 어둡고 깊은 수렁으로부터의 탈출 시도였다.
어떤 지옥
소설 속 ‘나’의 지옥은 가난과 가정이다. 소설의 초반부터 아버지의 둥장은 강렬하다. 필요 이상으로 무심하고 다소 폭력적인 여느 중년 남성과 다름없는 캐릭터의 아버지 아래서 ‘나’는 자랐다. 자식에게 오천 원 한 장 주는 데에 인색하면서 “야, 너 설마 돈 모으냐?”라고 질문하는 모순의 태도와 “보일러 좀 켜봐”라는 명령조의 말투는 지극히 낯익다. 제삼자에게는 아버지의 말투가 무뚝뚝한 일상어로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자식인 ‘나’에 마음을 이입하자면 아버지의 모든 말에 날이 선 것처럼 들린다. 그 말의 날카로움은 마치 애써 벼리지는 않았지만, 매일 조금씩 다듬어 반질거리는 칼과 같다. 사용하는 사람에게 아주 익숙해서 상대방의 심정을 헤아리지 않은 채 휘두르는 그런 칼. ‘나’는 겉보기에 평범한 가정에서 다층의 폭력 아래 ‘방치된’ 청소년이다. 그런 ‘나’의 정보와 삶의 단서는 소설의 곳곳에서 보인다.
첫째, 그의 어머니가 과거에 집에서 나갔다. 둘째, 그의 곁에는 동생이 한 명 있다. 셋째, 이야기 안에서 크게 부각되지는 않지만 그의 친구가 사고로 사망했다.
‘나’의 어머니가 집에서 나간 사건은 ‘나’를 아버지가 끊임없이 자식을 의심하는 행위를 설명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전형적인 캐릭터(폭력성을 띤 중년 남성)와 어머니의 가출은 가난한 가정의 도식처럼 이어지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이런 전형성에서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하기 위해서는 부모의 폭력성을 새로운 방식으로 비틀거나 동생인 ‘준’의 캐릭터를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편이 좋다. 사실 이 끝없는 회색의 배경 속에서 유일하게 천진난만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건 준뿐이다. 그렇기에 준의 이미지는 언뜻 환상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준의 이런 특징을 십분 활용하면 훨씬 이야기의 신선도를 높일 수 있다.
어머니가 집을 나간 날부터 ‘나’에게 실제로는 없던 동생이 환상으로 보인다면 어떨까. 자신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추궁하는 아버지에게서 잠시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이 ‘준’과의 대화뿐이라면. ‘나’는 좀 더 준에게 기대고 준도 그런 ‘나’에게 한없이 너그럽고 순수한 아이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나’는 주변의 상황으로 인해 몹시 지친 상태다. 그런 ‘나’에게 준이 가진 어린이 특유의 매력은 훨씬 다양한 방향의 위로를 건넬 수 있다. 또한 소설 속 준이 환상이라면 ‘나’가 동생을 반드시 데리고 가출하려는 행동도 강조할 수 있다. (사실 준이 소주를 사들고 오는 장면에서 그가 환상이지 않을까 의심했다. 어린이로 보이는 준이 어떻게 소주를 살 수 있었을까. 하지만 소설 전체에서 준이 환상이라는 암시는 발견하지 못했다.)
준과 더불어 눈길을 끌었던 내용은 의외로 ‘친구의 사고’에 대한 언급이었다. ‘나’의 수많은 불행에는 친구의 죽음도 있었다. 소설 안에서 인물의 죽음은 생각보다 큰 무게를 지닌다. 더군다나 사고로 인해 주어진 수명을 다하지 못하거나 어린 시절에 죽은 인물은 독자의 내면에 큰 파문을 만든다. 그가 아주 잠시 등장하거나 이야기에 스쳐 지나가더라도, 찰나의 순간에 독자들은 그 인물을 선명히 기억한다. ‘나’의 친구는 왜 사고를 당했을까. 그의 죽음으로 인해 ‘나’는 “병적으로” 안전벨트를 찾는 사람이 되었다. 주인공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큰 사건의 작동은 주변 상황에 끊임없이 영향을 준다.
그러나 친구의 죽음이 소설 안에서 크게 기능하기에는 이미 ‘나’에게 주어진 불행이 많다. 그 사고를 잠시 언급하고 지나간 작가의 선택은 영리했다. 그렇다면 친구의 죽음은 소설 안에서 필요한 장면인가,라는 처음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나’의 과거에 작은 사고가 있어서 그가 안전벨트를 습관적으로 메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주인공 내면의 불안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하다. 사고를 통해 아버지의 캐릭터를 강조하는 것도 좋다. 과거에 아버지가 차량을 난폭하게 몰았던 기억이 있다면 주인공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이 소설의 어디에서 무슨 모양으로든 주인공에게 따라붙는 단서는 ‘불행’이다. 불행은 수많은 시간을 중첩해 ‘나’의 땅을 조금씩 아래로 끌어당겼다. 그렇게 ‘나’는 미처 깨달을 틈도 없이 깊은 구멍에 빠져버렸다. 그 구멍은 평지를 걷던 ‘나’의 앞에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다. ‘나’의 주변 세계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침강해 생긴 지옥이다.
탈출
작가는 소설 안에서 ‘나’가 선 땅과 주변 환경의 분위기를 적당한 무게로 조성했다. 독자에게 불편하지도, 낯설지도 않은 보편적인 가난의 어려움이 ‘나’의 앞에 닥쳐 있다. ‘나’는 그 안에서 탈출을 시도한다. 학교라는 제도에서 벗어나고, 집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한다. 그는 동생과 함께 버스표를 끊는다. 자기 한 몸을 추스르기도 힘든 상황 변화 안에서 동생까지 서툴게 챙기는 그의 행동이 조마조마하면서도 대견하다. ‘나’의 탈출을 오롯이 응원하고 싶은 마음마저 생긴다. 그에게 딸린 동생과, 그에게는 없는 엄마와, 그에게서 떠난 친구, 사백만 원의 통장 잔고를 다 제쳐두고 ‘나’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그를 지지하고 싶다. 그의 탈출 시도는 수많은 가난의 구덩이에서 맨몸으로 등반에 도전하는 사람들을 닮아 있기 때문이다.
전형적이고 그럴법한 이야기는 조금만 비틀어 새롭게 써도 공감을 얻기 쉽다. ‘준’이라는 이름의 동생을 주인공보다 앞서 내세운 이 작가의 작은 시도에 이미 독자 한 명의 마음이 움직였다. 완전히 가난과 불행에 둘러싸인 주인공이 일인칭의 시점으로, 자신의 이름과 함께 모든 것을 전면에 내세워 설명했다면 이 단편은 조금 숨막히는 소설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소주를 들고 가는 순수한 동생 ‘준’을 보는 순간, 독자와 불행, 독자와 가난 사이에는 다섯 발자국 남짓의 틈이 생긴다. 유리벽에 바짝 붙어서 내부를 관찰하던 독자들이 이야기에서 잠시 숨을 고르게 하는 것, 준의 역할은 그것이다. 그럴듯하고 전형적인 풍경을 새롭게 만드는 것. 회색의 세상과 섞이지 않는 약간의 연둣빛을 이야기에 더하는 것.
가난으로부터의 완벽한 탈출은 쉽지 않다. 그러나 사백만 원으로 서울에서 삼 개월을 버틸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청소년의 무모한 도전은 불행의 벽에 약간의 균열을 내고 있다. 앞으로 그에게 어떤 일이 닥칠 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집에서의 탈출, 익숙한 침잠과 어둠에서의 탈출 시도가 단지 ‘무모함’에서만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가난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불행도 이렇게 과감한 마음가짐으로 조금씩 부서지기를 소원한다면 지나친 바람일까.
이 소설 안에는 익숙한 것 안에서 꿈틀대는 새로움이 있다. 아마도 그것은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사이에 핀 꽃일 수 있다. 신선함은 가끔 깨닫지 못하는 틈에 이야기 안에서 피어난다. 그러나 작가가 그 꽃을 발견했다면 시들지 않도록 힘써 가꾸어주길. 매일 걷던 길 위에 생뚱맞게 핀 화려한 꽃처럼 자꾸만 뒤돌아볼 수 있는 이야기, 카메라 속 사진으로 담고 싶은 ‘나’의 이야기가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