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브릿G에서 웃긴 글 찾아다니는 코미디 강도 일월명입니다. 간만에 정말 재미있는 작품을 찾았네요.
사실 저는 장르 소설의 제목으로 기존 고전 소설을 차용하는 데엔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표절 문제 등의 시시비비를 따지기 때문이 아니라, 오늘 갓 창작된 따끈따끈한 소설의 이미지는 그것이 독자에게 읽히기도 전에 기십 년에서 기백 년의 시간 동안 수많은 이들에게 읽히며 견고히 굳은 고전 소설 고유의 캐릭터에 너무나 쉽게 잡아먹히기 때문입니다. 당장 이 소설의 제목도 도스토예프스키의 걸작을 패러디한 게 명확하죠. 그래서 오늘 편집부의 추천사가 올라오기 전까지는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까보니까 진짜 물건이네요 이 소설. 게다가 이게 단편이 아니라 연재작이라니.
소설에서 고증을 따지는 일은, 보다 유순하게 말해 핍진성을 따지는 일은 작가에게나 독자에게나 피곤한 일입니다. 우리는 결국 한낱 인간이라 세상을 전부 알 수 없고, 어떤 사실의 모르는 부분을 추론과 상상으로 메우는 행동은 그 사실을 직접 겪은 사람에겐 허무맹랑하고 비웃긴 날조가 되어버리죠. 거기다 설령 같은 사건이라 해도 그것을 겪은 개개인의 경험은 천차만별이라는 점까지 감안하면 생각할 게 더 많아집니다. 이게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과 모든 정보를 볼 수 있는 웹이라는 공간과 만나버리면서 ‘모두에게 있을 법 하게 여겨지는 글’을 쓰는 일은 이젠 사실상 불가능해진 거나 다름없습니다. 온라인에서 무거운 글이 점점 사라지는 이유이지 않을까 싶어요.
이러한 공간에서 끝까지 살아남는 건 어느 누구에게도 사실이 아니고 또 어느 누구의 기분도 상하게 하지 않게끔 가공된, 그리고 어느 누구나 깊게 생각하지 않고 이해할 수 있는 정형화된 도식입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밈(meme)이라 부르는 것들 말이에요. 흥미롭게도 밈의 성격은 그것이 쓰이는 전제와 맥락이 특정되어 있다는 데서 서사 문학의 클리셰와도 상응합니다. 하나의 장르가 고착화될수록, 어떠한 밈을 사용해 발화하는 이들이 늘어날수록 A=B라는 공식은 변형 불가능한 일종의 사회 방언이 되어버리죠.
그런 밈과 장르적 클리셰를 일부러 ‘적재적소’에 쓰지 않는 행동은 침대를 사진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소통을 목적으로 이렇게 한다면 곧바로 교정의 대상으로 지목될 테지만, 타인에게 우스꽝스럽게 느껴지리란 것을 알고 일부러 그런다면 그건 유머입니다. 이 소설처럼요. ‘내용 고증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 까라마조프가 홍루이젠에서 씬피자를 시켜먹고 낫토 주스를 마시게 된다‘는 작품 소개 문구는 읽는 이로 하여금 무심코 왜 까라마조프가 홍루이젠에서 씬피자와 낫토주스를 마실 수 없는지(혹은 그래서는 안되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모든 게 옳게 돌아가야만 한다는 강박적 사명감을 잠시 내려둘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이런 농담을 통해 단단하다 여겼던 사회적 약속의 틀을 일시적으로 깨는 해방감과 즐거운 지적 스트레스를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코미디가 필요한 이유죠.
몽타주처럼 짜깁기한 각종 장르 도식이 낯설더라도(정확히 얼마나 많은 장르가 활용되는지 짚지는 못하겠습니다. 그냥 이해가 안 되는 어휘나 전개가 있다면 ‘아 이건 내 주 향유 장르가 아닌가보다.’라는 생각으로 읽는 게 좋습니다.) 오래 전 <투명드래곤>을 읽고 웃은 적 있는 분들이시라면 이것도 즐길 수 있습니다. 우린 아직까지 아무도 발록이 뭔지 모르잖아요. 까라마조프가 누구나 쓸 수 있는 사람 이름일 뿐이라는 것만 알면 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