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시간은 과연 모두에게 공평할까.
엇비슷한 환경에 놓인 사람들이 한결같이 생존을 해결하던 과거에는 이 질문에 누구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 ‘시간이 모두에게 공평하다’는 말은 진리와 같은 문장이었으며 다들 비슷한 속도로 걷고, 뛰고 밥을 먹고, 작업했다. 이 사람보다 저 사람이 조금 더 빨리 달린다고 해서 한쪽이 서울에서 부산을 가는 시간 안에 다른 쪽이 서울에서 미국을 가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나 과학과 기술의 가파른 발전, 고도로 경쟁화된 사회적 풍조는 나와 당신의 속도를 갈라 놓았다. 맨발로 달리는 사람이 한 시간에 십수 킬로미터를 간다면, 비행기를 탄 사람은 한 시간에 수백 킬로미터를 이동한다. 걷는 사람과 자동차를 탄 사람, 비행기와 우주선을 탄 사람이 갈 수 있는 거리는 완전히 달라졌다. 같은 이유로 누가 어떤 기술을 선점 혹은 독점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24시간은 월등히 다른 질을 가지기 마련이다.
이제는 단순히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자는 것만으로 타인과의 격차를 좁힐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나와 당신의 속도 차이는 동시에 경제적 능력의 차이일 수 있으며 때로 학습의 차이일 수 있다. 양극화가 낯설지 않음을 넘어서 보편화되고 있는 지금, 어쩌면 가장 빠른 사람과 가장 느린 사람의 ‘인생 격차’는 빛의 속도일지 모른다. “제발 조금만 천천히”라고 부르짖는 누군가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빛에 탑승한 사람이 있다. 그가 지구를 일곱 바퀴 반 도는 동안 어떤 사람은 눈을 깜빡일 뿐이다. A가 ‘무엇이 바뀐 거지, 무엇이 달라진 거지’, 알아차릴 틈도 없이 B는 지구를 일곱 바퀴 반 돌았다. A가 눈을 두 번 깜빡이면 이미 B는 지구를 열다섯 바퀴 돈 상태다. B가 ‘너는 뭘 하길래 내가 지구를 열다섯 바퀴 도는 동안 눈을 두 번 깜빡일 뿐이냐’라고 한심스럽게 중얼거려도 A에게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이 거대하고 다층화된 속도 변화는 단지 “지독한 숙취에 눈꺼풀을 들어올리는” 찰나의 순간에 발생했다. 우리의 세계는 하나둘 빛에 올라타고 있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는지 파악하지도 못한 사람들은 자동으로 제쳐진다. 그들은 미래의 선택지에 들지 못한다. 그러니까,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눈꺼풀을 들어올리기만 했을 뿐인데 이미. 다들 지구를 일곱 바퀴 반씩 돌아버린 것이다. 빛에 탄 사람들은 너무 빨라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마음만 먹으면 느린 사람들을 제치고 세계를 장악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일은, 우리에게 아주 가까운 곳에서 벌어지는 중이다.
그러니까, 돌아버리는 거지.
오메르타 작가의 소설에는 특유의 유머와 재치가 배경과 대사로 녹아 있다. 이번 단편 〈제발 조금만 천천히〉도 예외는 아니다. 이 소설은 작가의 단편 중 유독 SF에 가까운 색채를 띠고 있다. 작가는 ‘상대성 이론’에서 주로 논의되는, 속도에 따른 시간 차이를 작품 안에 과감히 도입한다. 사람들의 차이는 ‘속도’에서 발생한다. 서두에서 언급했듯 ‘속도’의 차이는 양극화를 만들기 쉽다. 어떤 소외는 속도의 차이에서 발생한다. 오메르타 작가는 이 소외의 과정을 기민하게 파악해 소설 안에 녹여내고자 했다. 변화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다. ‘속인’과 ‘완인’들은 무작위로 달라진 속도를 체감한다. 그들의 의지는 전혀 반영되지 않은 채, 언뜻 보기에도 한쪽이 불리한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소외되기를 힘써 원하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다른 이와의 관계가 어려워 일시적으로 조용한 곳을 찾을 수는 있으나 세상에서 끝내 혼자만 남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 소외는 타의로 발생한다. 피해자는, 소수자는, 약자는 대체로 자신이 미처 깨닫지도 못하는 어떤 찰나의 순간에 이미 그 위치에 ‘지정’되어 버린다. 누구의 의견도 반영하지 않은 채 ,세상은 그들을 규정한다. 그것은 마치 속인과 완인이 ‘어느 날 갑자기’ 발생했다는 이 소설의 설정과 통하는 바가 있다. 완인들은 지극히 생존에 불리한 상황에 갑자기 처할 것이라고 스스로 예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되었다. 빛의 속도로 돌아가는 세상에 덩그러니 두 발만 디딘 채로 남아버린다. “그 사람 말 대로라면 우리가 완인이라는데” 완인이 뭔지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그것으로 규정된 채하처럼.
‘소외’와 ‘소수자’의 이야기는 ‘다름’과 ‘차이’에서 출발한다. 그렇기에 차별의 서사와 스토리텔링이 단순히 인물 간의 ‘내외형적 차이’를 주목하는 것에 그치는 경우는 적지 않다. 흔히 ‘넌 우리와 다르다’라는 프레임에서 끊임없이 배제되는 개인이 소설에서 그려질 때 ‘다름’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이야기는 입체감을 잃을 수 있다. 오메르타 작가는 이런 좁은 시선을 경계하며 인간의 특성 자체를 근본부터 바꾸어 버린다. 그것은 일종의 환상을 기초로 한 실험이다. 소설 속 세계에는 한쪽이 다른 한쪽을 능가할 수 없는 벽이 세워진다. 가해자가 시각화되지 않는다. 그들은 너무 빠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표출하는 혐오는 명백하다. 이런 설정은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하는 동시에 효과적으로 주제를 강화한다. 현실에서 벗어난 상상을 통해 다방면의 생각과 판단이 발생하고 소설은 더욱 풍성해진다. 오메르타 작가는 소설에 비현실적인 설정을 가미해 일종의 ‘그럴듯한 환상’으로 끊임없이 독자의 시선을 분산시킨다.
그리하여 독자들은 속인과 완인 사이에서 발생하는 유리함과 불리함, 그리고 환상 사이를 오가며 그 안에 담긴 진짜 이야기를 읽는다. 이 소설에 담길 수 있는 건 다층적인 차별의 역사다.
유구한 혐오의 역사
채하와 지원을 비롯한 완인은 극단적인 혐오의 위협에 빠진다. 속인은 완인의 머리를 자르고, 완인을 폭행하고 유린한다. 자신들이 생존에 유리하다는 이유로 속인들은 무법지대를 만든다. 한 무리가 다른 무리의 우위에 서자마자 모두가 같은 속도로 걸을 때는 상상할 수 없던 상황이 연출된다. 작가는 이 장면을 통해 굳이 ‘속도의 차이’가 발생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혐오’할 준비가 늘 되어있다는 것을 은유한다. 어떤 사람들은 ‘차별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다.
갑자기 바뀐 상황만큼 사람들의 태도도 급변하기 시작한다. 광신도를 믿는 집단이 생겨나고 (광신도는 세상이 어딘가 비틀어질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한다) 인신공양을 하려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속인’이 되는 것을 ‘구원’이라 믿는 완인들이 거리를 활보한다. 느린 속도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라는 주장은 분명 극단적이다. 하지만 그런 시선이 낯설지는 않다. 우리는 종종 자신이 우월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열등한 이들을 구원하려는 움직임을 본다. (주로 구원하려는 쪽이 구원받는 쪽을 정한다. 오히려 속인들이 완인에게 일방적인 구원을 베풀듯 조롱한다면 어땠을까.) 그들은 신이나 종교의 이름을 빌려, 또는 자신이 가장 ‘우월’하다고 믿는 어떤 것을 내세워 그들의 경계에 들지 못한 사람들에게 선심을 쓴다.
“다름을 혐오하는 인류의 역사는 유구하다.” 완인들이 몸을 피한 장소가 하필 과거에 천주교 신자들의 목을 벤 절이었다. 세상이 아무리 좁다고 해도 이런 우연은 쉽지 않다. 그러나 반대로, 이 땅에 혐오와 관련 없는 지역이 존재할까. 어떤 곳이든 강자가 약자를 짓누른 흔적이 있다. 속인은 손쉽게 완인을 추격해 위협을 가한다. 그러나 순식간에 가해지는 공격에 완인들은 최선으로 방어한다. 속도가 안 된다면 힘으로. 완인이 속인을 물어뜯자마자 기이한 일이 발생한다. 속인이 완인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완인들은 스스로 힘을 가져 충분히 속인을 공격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들은 속인에게 복수를 결심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치도록’ 속도를 내지르고 있는 이 세상을 구원할 계획을 짠다. 속인과 완인은 사실 하나의 속도로 걷던 사람들이었다. 완인들에게 “항상 시간에 쫓기고, 일분 일초라도 허투루 보내는 것을 조급해하며, 여유없이 사는 사람들”을 해방할 기회가 생겼다. 느리지만, 확실한 방법으로 “그들을 해방시킬 수 있다”는 다짐이 완인들 사이로 퍼져 나갔다.
맺으며
오메르타 작가가 쓰고자 했던 구원은 타인의 목을 물어뜯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 안에는 완인들의 몸부림이 숨어 있다. 어떤 것을 말로 타이르거나 권유하는 것만으로는 설득할 수 없다. 목놓아 외치는 부르짖음에 응답하지 않는 세상을 향해 소외된 개인은 손을 뻗는다. 그들은 세상의 한 귀퉁이를 잡고 물어뜯기로 결심한다. 말을 듣지 않으면 물어뜯겠다는 공격의 의사 표시가 아니다. 이렇게라도 우리와 함게 하자는, 가장 조용한 권유다. 우리와 함께 한다고 당신은 죽지 않습니다. 그냥 조금 느려질 뿐.
인간의 실수로 발생하는 여타 종말론적인 좀비 아포칼립스와 달리 〈제발 조금만 천천히〉는 구원론에 기반한다. 망해버린 인간세를 되살리기 위해, 좀비는 바이러스가 아닌 인간의 욕망에서 시작된다. 나와 다른 시간을 달리는 당신에게 우리의 목소리를 전달하려는 따뜻함은 새로운 좀비 스토리텔링의 길을 만들었다. 유토피아를 만들려는 구원이 아니라, 디스토피아를 늦추려는 구원 서사는 이제 한 발을 떼었다.
좀비는 그렇게 탄생한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