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은 또 어떤 옷을 입어야 할까? 얼마 전 예뻐서 산 옷에 눈이 가지만, 친구들 만나러 가는 자리에는 조금 과할 것 같다. 그렇다고 후줄근한 츄리닝과 모자를 고를 순 없다. 친구들에게 종일 집 안에서 할 일 없이 뒹굴대다 급히 나온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다. 그러다 결국엔 약속 시간에 늦는다. 친구들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까 벌써 머리가 아프다. 시간 약속을 가벼이 여기는 실없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는 않은데, 뭘 입을지 고민하다 늦었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그건 또 실‘있’는 사람이 되는 걸까?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이 있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가 했다는 말인데, 우리가 타인과 교류하며 떠올리게 되는 수만 가지 고민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찰떡인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크든 작든 관계망 속에 속해 있으면서 타인과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이루며 살아간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눈 비비며 마주하는 타인이든, 스마트폰 주소록이나 카톡 친구 목록에 있는 타인이든, 구독과 팔로우로만 연결된 타인이든 상관없다. 우리는 타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타인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에 영향을 미친다.
관계망 밖에서 살아남기 힘든 인간이지만, 관계를 이루며 살아간다는 것 역시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매 순간 타인의 눈에 내 모습이 어떻게 비칠지를 고민하고, 나의 본모습이 타인에 의해 부정당할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면, 정말이지 하루하루 숨 막히는 나날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세상은 또 겉보기와 다르게 지나치게 일방적인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지옥이 있으면 천국도 어딘가에 마련돼 있는 법이다. 이는 ‘무협’의 세계관에서는 매우 당연한 이치인데, ‘찌르기’라는 초식이 있으면 ‘막기’라는 초식으로 대항할 수 있는 것이다. 물은 불을 이기고, 불은 쇠를 녹인다는 오행이나, 가위바위보를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고로,
타인은 지옥이다.
그러나,
생각만큼 나를 의식하지 않는 것 또한 타인이다.
내가 어떤 옷을 입고 나가든, 친구들은 나를 이상한 사람 취급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가 약속 시간에 늦어도 친구들은 나를 지각쟁이라고 타박할지언정 실없는 사람으로는 여기지 않을지도 모른다. 친구로 지내오는 동안 그들이 나를 한 번이라도 그렇게, 내가 우려하는 방식으로 대한 적이 있던가? 설사 그들의 눈에 비친 내가 나의 본모습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지라도, 그들이 그것을 언급하며 나의 본성을 재단하려 한 적 있던가? 어쩌면 이 모든 고민과 우려는 그저 나의 착각이자 기우에 불과한 것 아닐까?
2.
소설 『기이해 보이는 보통의 하루』는 프랑스에 사는 어느 한국인 부부의, 평범해 보이는 일상 속에 도사리고 있는 지옥도를 묘사하는 작품이다. ‘진영의 시점’과 ‘민우의 시점’으로 구성되며, 같은 사건을 두고 엇갈리는 인물들의 서로 다른 관점과 그에 따른 갈등이 심화되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진영과 민우는 초등학교 때부터 이어온 인연을 부부로까지 발전시킨 사이로, 2년 전부터 프랑스로 이주해 살고 있다. 남편인 민우는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편, 잘나가는 추리소설 작가이기도 하다. 반면에 아내인 진영은 5년 전 처음 써본 소설이 신춘문예에 당선된 이후 로맨스소설을 쓰고 있지만, 변변한 성과 없이 고전 중이다. 함께하는 일상의 단편을 누가 먼저 소재로 각색하느냐를 두고 티격태격하기는 해도, 두 사람은 낯선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의지할 줄 아는 좋은 부부처럼 보인다.
잔잔해 보이는 부부의 일상에 파문을 일으키는 것은 욕실 창가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그림자이다. 욕실 안을 훔쳐보려던 시도가 분명하다며 진영은 외부에서 창을 통해 실내가 들여다보이는 문제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한편, 시큰둥해 보이는 민우에게 서운함을 느낀다. 반대로 민우는 안정된 삶을 위해 머나먼 프랑스까지 날아왔는데, 좀체 평안해지기를 거부하는 듯한 아내의 태도가 오히려 불만스럽기만 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사 간 줄로만 알았던 윗집 남자인 듀끌로 씨가 알몸으로 복도를 서성이는 모습으로 두 사람 앞에 나타난다. 민우는 그를 위험한 사람 취급하며 상종하지 말 것을 당부하지만, 출장을 간 사이 가족 모두가 말도 없이 떠나버렸다는 듀끌로 씨의 사연을 모른 척할 수 없었던 진영은 그에게 차 한 잔을 대접하기로 한다. 진영이 아니었다면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르겠다며 불안한 모습을 보이던 듀끌로 씨는 그녀에게 뜻밖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얼마 전 두 사람의 집 창가에 서 있는 동양인 남성을 목격했다는 것이다. 사진을 보면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겠느냐며 진영이 내민 휴대폰 화면에서 듀끌로 씨는 긴가민가해 하다 결국 두 사람을 집어낸다. 하나는 민우이고, 다른 하나는 민우가 일하는 어학당의 직원인 영진이다. 두 사람은 너무도 다르게 생긴 터라 진영의 마음속에서 듀끌로 씨를 향한 의구심이 일기 시작하는데, 이어지는 그의 말이 그녀의 의구심에 쐐기를 박아넣는다.
“앞으로 볼레(Volet)를 잘 내리셔야겠어요. 특히 샤워할 때는 말이죠.” (ep.3)
*‘볼레’는 외부를 향해 나 있는 덧창을 의미함.
의심은 곧 경멸로 변한다. 하지만 진영은 이내 생각을 달리한다. 자신이 너무 이기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눈에 보이는 사소한 것들 하나하나를 내 기준으로 평가하고 있다. 정상이다. 비정상이다. 보통이다. 정신이 나갔다. 순전히 내 기준이고, 지나치게 엄격한 나만의 잣대다.” (ep.3) 진영은 듀끌로 씨의 혐의를 하나하나 스스로 변호하기 시작한다. 그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억지로 만들어내면서까지 그를 이해하려 한다. 건장한 성인 남자가 야밤에 알몸으로 집 밖을 돌아다니다 아랫집 여자를 놀라게 만든 사건으로부터 죄책감과 책임감을 떠안는 사람은 그렇게 듀끌로 씨가 아니라 되레 그녀 자신이 되고 만다.
하지만, 왜?
타인은 타인의 잣대를 들어 나를 억압하고 판단하지만, 나 역시도 타인을 바라볼 때 나만의 기준을 들이대지 않을 수 없다. 타인이 내게 영향을 미치는 만큼, 내게도 타인에 대한 영향력이 존재한다. 그리고 타인을 재단할 때의 나의 기준은 대개 나 자신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입은 옷이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이상해 보인다면, 그것은 내가 옷을 그렇게 입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누군가의 행동이 못마땅하게 여겨진다면, 그것은 내가 그렇게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만일 누군가의 잘잘못을 따지기보다 다소 억지스러울 정도의 이해심을 갖고 헤아려 보고자 노력하게 된다면, 그것은 지금 나 역시도 그러한 이해와 노력이 갈급한 상태라는 방증일지 모른다.
민우와 함께 간 고급 레스토랑에서 진영은 그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좋아하지도 않는 디저트를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넘긴다. “내가 괴로운 만큼 그가 행복해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내가 예전의 불행에서 조금 벗어난 만큼 그는 조금 더 불행해진 것처럼. 언제부턴가 우리의 행복은 제로썸 게임이 되어 버렸다.” (ep.5)
‘진영의 시점’에서 민우에 대한 진영의 저자세는 상대적으로 고압적이고 그녀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 듯 보이는 민우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처럼 그려진다. 하지만 ‘민우의 시점’에서 그가 남모르게 겪고 있는 고충과 두 사람이 함께하기 위해 그가 무엇을 희생했는지가 드러나면서 소설은 차츰 독자로 하여금 조금 다른 방향으로 두 인물을 들여다보도록 종용한다.
진영은 민우에게 모든 것을 맞추며 사는 듯 보이지만, 어학당에서 일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에 응하지 않고, 한국에 다녀오자는 말에도 ‘아이들’ 핑계를 대며 번번이 거절하기 일쑤다. 돈 많은 집 자제인 민우의 숱한 여성 편력을 옆에서 지켜봐 온 진영은 자신과 결혼한 그의 진심을 끊임없이 의심하며, 틈만 나면 그에게 자신의 청혼을 승낙한 이유를 묻는다. 매번 같은 패턴으로 돌아오는 그의 장난 같은 대답에 피식 웃고 말다가도, 그녀는 농담으로라도 한 번을 “사랑한다” 말해 준 적 없는 그가 야속하기만 하다.
그가 함께해주는 것만으로 고맙고 미안하다, 말하면서도 그의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진영의 태도가 타인의 시선이 빚어낸 제약이라 한다면, 이 역시 타인과 무관한 자기 내면 심리의 반영일 수 있다. 사실 그녀의 내면에는 그에게 어울리는 여자, 사랑받아 마땅한 아내가 되지 못했다는 자괴감과 그렇게 되고 싶다는 욕망이 충돌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겉보기에는 그녀가 민우에 의해 납작 엎드려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녀의 왜곡된 자기실현의 욕망이 타인(민우)을 바라보는 잣대이자 타인(민우)의 시선이 되어 스스로 옭아매고 있는 형국이 되는 것이다. 결국 나는 타인으로부터 받는 시선에 의해 제약 속에 살아가고 있지만, 그 시선들이 어떠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지를 상정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며, 타인의 시선은 내가 나에게 바라는 모습이 실현되지 못할 때 스스로 가하는 채찍질의 일환일지도 모른다.
3.
키우는 고양이의 몸에 줄넘기 줄을 감아놓은 듀끌로 씨의 만행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민우의 물음에 진영은 이렇게 답한다.
“두려웠겠지.”
“뭐가?”
“그 녀석마저 가버릴까 봐. 떠난 가족이 그리운 만큼 고양이에게 집착했을 거야. 그래서 자꾸 밖으로만 도는 녀석을 붙잡아 두려 한 거고.” (ep.11)
진영에게 있어 떠나버릴까 봐 두려운 존재는 남편 민우다. 이 장면이 놓이는 위치는 작품이 ‘진영의 시점’에서 ‘민우의 시점’으로 전환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지점이다. 진영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민우의 태도나 행동들이 민우의 입장에서 변명의 기회를 얻으며, 지금까지 민우로부터 어떤 혐의점을 찾고 있던 독자로 하여금 도리어 그 타깃을 진영으로 변경할 빌미를 제공한다. 그러니까 이 장면은 민우에게도, 진영에게도 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음을 시사하며, 두 사람 사이에 합의와 화해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 장면은 두 사람의 가치관이 극명하게 엇갈리는 대목이기도 하다. 진영이 듀끌로 씨의 만행(고양이를 줄넘기 줄로 묶어 놓은 것)을 어찌 됐든 이해해 볼 수 있는 행위로 여기는 것과 달리, 민우에게는 듀끌로 씨가 ‘명백한 동물 학대범’으로 인식될 뿐이기 때문이다. 민우의 단정(斷定)을 낳은 어린 시절의 속사정으로 인해 그는 진영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어른이 됐는데, 그 사실을 그녀로부터 감춰두고 싶어 한다.
“그녀는 아직도 지독히 어두웠던 내 어린 시절을 모른다. 그 암흑에서 날 지탱해 준 단 두 가지가 모두 그녀가 준 것이란 사실도. 내 첫사랑이자 어린 시절 어머니였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은 내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가족이란 것까지도. 앞으로도 아마 알 일은 없을 것이다.” (ep.10)
민우는 자신의 과거와 본성을 진영이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녀는 그녀의 잣대로 그를 판단할 것이며, 그 결과 그녀가 그를 부정하게 된다면, 그는 그녀를 떠날 수밖에 없다. 그의 침묵은 자기 보호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와 함께하고 싶다는 욕망의 표출이기도 하다.
그의 이런 욕망은 진영이 혼자 있는 집에 어학당 직원 영진이 나타나고, 멀리 떨어진 한국에서 민우가 cctv 앱을 통해 두 사람을 훔쳐보게 되는 대목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진영과 영진이 연출하는 다정한 모습에 민우는 분노하면서도 끝끝내 그녀에게 두 사람의 일을 추궁하지는 않는다. 그는 그녀가 원하는 결혼생활과 가족관에 어울리는 남자가 영진이며, 자신은 결코 영진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에게 자신의 질투심과 옹졸함을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다. 굉장히 치밀한 성격의 그의 내면에서는 그녀와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해 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계산이 순식간에 이뤄진다. 그는 그녀를 속속들이 꿰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추론하며 그에 맞는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자신이 그녀를 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타인(진영)의 시선을 의식하며 자신의 행동양식을 결정하는 민우의 태도 역시 진영의 경우처럼 자기 내면 심리의 반영으로 읽을 수 있다. 다만 그 양태가 상대방에게 다소 굴복적인 형태를 취했던 진영과 달리, 민우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고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상대방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아 자신을 빛나 보이도록 포장해야 하는 일종의 강박에서 비롯된 자세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사랑하는 아내에게조차 자신의 트라우마와 약점을 철저히 감춰야 한다고 의식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그가 진영과 영진의 다정한 모습을 보고 느꼈던 바와 같이, 그녀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어 그녀가 원하는 단란한 가족을 이루고 싶은 자신의 욕망이 왜곡된 형태로 나타난 것이라 하겠다.
4.
두 사람의 불행은 일면 서로가 서로를 옥죄는 양상으로 나타나지만, 결국 그 기저에는 서로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데서 기인한 비뚤어진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 두 사람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고 또 이해하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진심을 감추고 있는 관계에는 결국 구멍이 나게 마련이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은 이내 갈증으로 나타난다.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이 낳은 비정상적인 친절은 베풀면 베풀수록 그에 따른 보상 심리가 커지게 된다. 약해 보이기 싫고 부정당하기도 싫다는 마음으로 본모습을 감추기만 하며 무조건적인 이해를 바라는 것은 욕심에 불과하다. 그들은 상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자신의 진실이 드러났을 때 상대가 온전히 받아들여 줄 수 있을지를 고민하면서도, 서로를 위해 각자가 얼마만큼의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되돌아보며, 그에 마땅한 보상이 돌아오지 않는 것이 불만스럽다.
결국 그들은 그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있는 방식이 실은 자기실현을 위한 욕망의 투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끝내 알지 못한다.
진영은 더 이상 억지로 용서하지도, 용서받으려 하지도 않겠다는 말로 자기실현의 욕망에 더는 타인을 도구 삼지 않겠다는 뜻을 드러내지만, 민우는 마지막까지도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지, 스스로 다음에 취해야 할 행동은 무엇일지를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쩌면 우리를 정작 지옥으로 몰고 가는 것은 타인의 존재가 아닐지 모른다. 그것은 다만 우리가 우리에게 바라는 모습에 부응하지 못하는 현실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부정적인 감정이 불러일으킨 착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타인의 눈에 내가 지금 어떤 모습으로 비칠지, 그 모습을 타인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우리는 갖은 상상으로 채워내며 스스로 고통받고는 한다. 타인의 시선이 빚어낸 제약이란 결국 내가 나에게 주는 형벌, 자학이다. 어딘지 껄끄럽기만 한 결말이지만 『기이해 보이는 보통의 하루』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아무리 이상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이라도, 우리는 또 그렇게 그냥저냥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