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이라고 함은 절대적이기도 하지만 상대적이기도 합니다. 누군가에겐 집이 있고 적당히 밥벌어먹을 수 있는 정도면 충분할지도 모르겠지만, 누군가에겐 그 정도도 사치일 수 있으니까요. 개인적으로 가난하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중산층이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아무튼 가난으로서 자기객관화를 바라는 게 지나치게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욕망하지만, 너무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욕망을 거세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혹은 간혹 너무 극단에 이르게 되는 상황도 왕왕 발생하고는 하죠. 무엇이 옳다는 이야기를 하기보단, 무엇이 어떻다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 부분을 드러내는 장치는 주인공의 돈에 대한 집착입니다. 50만 원 정도를 아버지가 준 돈을 쓰지 않고 모으는 것으로 묘사하는데, 이 부분은 50만원이라는 적잖은 돈이 외려 끈적끈적하게 집안을 가득 채운 가난과, 그 가난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주인공의 태도를 드러내게 되는 거죠. 거기에 햇반을 사라고 5000원을 주는 장면은, 아마 이 소설 전반에서 돈의 가치가 얼마 쯤 하는 지를 표상하는 장면으로 봐도 무방할 거예요. 주인공만 먹으라고 햇반 하나 사오라는 건 아닐 테고 동생도 있었으니 2~3개 쯤 사오라는 이야기일 텐데, 5000원이라면, 햇반 하나에 1000원으로는 살 수 없다는 이야기겠고 그만큼 ‘식’의 구가에 장애가 있다는 이야기겠죠.
여기에 주인공이 서울로 가서 요리를 하고 싶다, 라고 이야기하는데, 이건 오히려 더 여실히 가난을 드러내는 장치라고 생각해요. 이 아이가 실제로 요리사 공부를 하려고 하기 보단, 음식점에 취직해서 벌어먹고 살려는 이미지로 느껴졌거든요. 뭐 예전부터 물려져 온 이야기지만, 적어도 배곯지 않고 살려면 음식점을 하라는 말이 있었죠. 음식 팔아서 벌고, 남는 걸로 대충 먹고, 아무튼 먹고 사는 대표적인 이미지가 강했어요. 근데 현대에 이르러서는? 자영업의 무덤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음식점으로 살아남는 일은 어려운 일이 되었죠. 거기다가 음식점 일이 좀 힘든가요? 알바만 따지더라도 파트 타임으로 하면 피크 타임 4시간 반짝 하는 일 밖에 없어서 벌기 무척 어렵고, 풀타임을 뛰면 10시간 12시간을 뛰어야 하는데, 거기다가 서빙 일 뿐만이 아니라 주방 보조 일까지 하면 정말 죽어나죠. 거기에 자영업이면 어떻겠어요. 체력이 받쳐줘야 가능한 일이죠. 물론 주인공이 음식점을 차린다는 이미지가 상상이 되진 않는 이야기죠. 어디까지나 집조차 구하지 못해서 전전긍긍하는 처지니까요. 그렇지만 이 음식점이라는 소재를 주인공이 꿈꾸는 것은 이런 본능적인 ‘식’에 대한 갈망의 반영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만큼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거죠.
역설적이게도, 주인공은 식을 원해 주를 포기합니다. 가출이죠. 400만원을 들고 동생과 함께 서울로 향하는 이미지는 굉장히 음울하면서도 낭만적으로 그려집니다. 제가 실제로 가출해보진 않았지만, 두 사람이 고생하다가 집으로 돌아올 일은 자명해 보여요. 그만큼 주거 환경의 확보는 어려운 일이니까요. 그리고 서울 집값이 좀 비싼가요? 그런 현실적인 측면의 이야기가 주인공의 낭만적인 출발을 침윤하면서, 무언가 음울한 분위기를 끌어내는 것이겠죠. 그런 점에서 이 소설에서 주거에 대한 이미지에 좀 우회적인 표현을 보입니다. 보일러는 돌아가기는 하지만, 돈이 많이 드니 씻을 때만 돌린다거나 하는 식으로요. 그런 점에서 기본적인 기능을 하는 집안이라는 점에서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집이 자가인 경우에야 그렇겠죠. 월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고요. 유지비는 어떤가요? 그만큼 주거에는 돈이 많이 들어가니까요.
이 낭만의 부분이 좀 명료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아버지가 기술을 배우라고 하는 장면입니다. 기술 배우면 먹고 살기 좋죠. 자기 객관화가 안된 누군가가 천대하는 경우도 왕왕 있지만, 기술은 보통 사회에서 필수불가결적인 요소이고 그 만큼 가치가 발생하는 작업이죠. 그런데 돈에 대해 집착하는 주인공이지만, 정작 기술을 배우라는 말에는 반발하는 장면이 눈에 띕니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다고 생각해서 일까요. 아니면 기술을 배울 수 있을 형편이 아니라는 걸 자각해서 그럴 것 같기도 한데,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이는 동시에 주인공이 가난에 대한 태도를 드러낸다고 생각해요. 집 나가면 고생일 게 뻔하지만 현실의 본인은 막연함으로 해나갈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죠. 곧 성인이 되기에 그건 어느 정도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동생도 돌봐야 하고, 그만큼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하고, 고생도 꽤 많이 해야 할 테죠. 그래도 주인공과 준은 서울로 향합니다. 두 사람에게 서울이란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있는 땅이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왠지 모를 아버지 역시 동일한 생각을 했었을 것이라는 기분에 휩싸여서 고속버스에 몸을 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바라게 될 때 지나치게 낙관해서 생각하는 경향성이 왕왕 있습니다. 로또 같은 것도 생각해보면 만에 하나라도 될 가능성이 없는데 하고는 하잖아요. 하지만 이 낙관이 마냥 낙관적인 상황을 떠올려서 만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패배한 현실에 의한 도피일 수도 있는 거죠. 그런 점에서 소설의 주인공을 바라볼 때 여러 가지 흔적들이 발견됩니다. 결손가정의 자신의 풍경이 망가진 마을과 잘 어울린다는 식의 토로라던가, 일반적으로 희망을 상징하는 별들이 ‘기분이 나쁘다’, 라는 묘사 등이 그렇습니다. 가정에서 어머니가 가출한 것 역시 슬프다던가, 그런 게 아닌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볼 땐, 무언가 비틀려 있음이 분명하죠. 그 만큼 자신의 미래 역시 불투명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 일거에요. 그런 점에서 해석해볼 때, 400만원 가지고 서울로 도망치는 행위는 말 그대로 도피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술을 배우라는 말에 반발한 것 역시 이런 일종의 패배주의로 해석할 수 있겠죠. ,그렇게 우리가 서울행을 응원하는 게 과연 해결책이 될까요. 그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