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를 위협하는 전염병이 창궐한 지 2년이 넘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방구석에 처박혀 방바닥과 오래도록 혼연일체를 이루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아 이제 그만 인간답게 살고 싶다!’
그런데 막상 정신을 차리자 다짐하고 장판에서 볼을 떼고 일어나 눈을 비비고 나면 이런 생각이 이어진다.
‘인간답게 사는 게 뭘까?’
나는 이미 인간인데다 사지 멀쩡하게 잘 살아 있는데, 뭘 어떻게 하면 여기서 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거지?
사회적 거리두기가 빚은 무료함과 심심함이 촉발한 게 분명한 이런 쓸데없는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 보면 결국 막다른 골목에 처한 것처럼 콱 막히는 순간이 찾아오는데, 바로 이 끝판왕 질문 때문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대부분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거리낌 없이 스스로 인간임을 자처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한번 묻는데 인간이란 대체 뭘까? 인간답게 살고 싶어 하는 나는 지금 인간이 맞긴 한 걸까?
나는 많은 종류의 장르소설이 이런 질문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존 가드너의 <그렌델>에는 인간을 증오하고 혐오하지만 ‘인간바라기’를 멈출 수 없는 괴물 그렌델이 나오고, 카렐 차페크는 인간의 시스템을 극단적으로 구현하는 데 성공하여 세계 정복을 눈앞에 둔 도롱뇽들이 너무도 인간다운 이유로 자멸하는 모습을 그린 바 있다.
한때는 이런 작품들이 인간의 정체성에 돌아오지 않는 부메랑 같은 의문을 던지면서도 한편으로는 결국 ‘인간’으로 회귀하는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 아마도 ‘인간’ 하면 떠오르는 가장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형태를 벗어난 무엇에 대해선 염두에 둔 적 없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세상은 나의 생각과 무관하게 무정하리만치 빠른 속도로 변화한다. 우리는 이미 휴대폰과 대화를 나누고, AI와 게임을 해 온 지는 오래됐으며, 인간과 쏙 닮은 가상 인간의 인스타그램에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남기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인간이 끊임없이 자기를 닮은 다른 존재를 꿈꾸는 이유가 무엇인지도 흥미롭지만, 그 꿈이 완전히 이루어졌을 때 인간이라는 종이 어떻게 될지에 대해 상상하는 일도 무척이나 재미있다.
최근 읽은 작품 중에는 이준혁 의 <그 별엔 닿을 수 없을지도 몰라>라는 단편이 있는데, 3D 기술로 탄생한 가상 인간이 영화계에 진출하는 시대를 매우 현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한 줄기 희망을 놓지 않게 하는 결말을 제시하고 있어 스크롤을 끝까지 내린 보람이 있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희망이란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가 변화의 바람에 떠밀려 본래 서 있던 자리를 잃고 방황하게 되더라도 결국에는 다시 길을 찾으리라는 믿음에 대해 약소하게나마 일부 지지를 얻은 듯한 감상에서 비롯된 표현이다. ‘인간’이란 결국 돌아오거나 돌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여서, 미래의 생활상과 가치관이 아무리 격변하더라도 우리는 다시금 우리의 가치를 재확립하게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이번에 읽은 준식 의 <흡혈귀는 죽어야 한다>에서 나는 조금은 다른 시각을 엿본다. 대강 한 문장으로 작품을 소개하자면, 스스로 인간임을 혹은 인간이었음을 온몸으로 부르짖으면서도 새로운 종의 탄생을 예고하는 인물들의 매력이 돋보이는, 그래서 뒤가 궁금해지는 소설이다.
나는 스토리텔링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개연성과 핍진성을 꼽는다. 개연성은 말이 되게 하는 것을 뜻하고, 핍진성은 말이 안 되는데 그럴듯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보통은 개연성 뒤를 핍진성이 쫓는데, 때로는 핍진성 혼자 개연성을 앞질러 가기도 한다.
아쉽게도 이 작품의 초반 서술은 개연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딱히 핍진하지도 못하다. 흡혈귀로 변한 주인공이 자기에게 물려 죽은 것으로 보이는 가족들의 주검을 이불처럼 덮고 있는 모습으로 잠에서 깨는데, 그들이 무슨 연유에서 주인공의 몸 위에 겹겹이 쌓여 있는 것인지 설명되지 않는다. 그저 가족들이 피를 모두 뽑힌 듯 앙상하게 굳어 있고, 주인공의 입 주변이 피로 흥건하다는 정도의 묘사로는 그들에게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다. 흡혈귀가 된 주인공이 그들 모두를 물어 죽였다고 치자. 그런데 왜 살인마가 하필 피살자들 밑에 깔려있냐는 것이다. 진짜 추워서 이불처럼 덮은 거라고? 에이, 설마.
이후 주인공은 자기가 모든 일의 원흉임을 의식하고 죄책감에 자살 시도를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전혀 공감할 수 없다. 가족의 죽음이 그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가족이란 어떤 존재였나? 아내와 사이는 좋았나? 아들과 딸은 각각 몇 살이지? 아무런 정보가 주어지지 않은 채로 독자는 주인공이 분노에 휩싸여 거울을 깨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이는 가족이 죽었고 자신이 살인자라는 데서 오는 죄책감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흡혈귀가 된 탓에 더 이상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지 않는 사실에 놀라서 벌인 일로 보인다. 그러니까 결국 주인공의 행위에 타당성이 뒷받침되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가족들이 하필 주인공의 몸 위에 쓰러진 채 죽어야 했던 이유, 주인공과 가족들의 관계를 암시해 줄 만한 사소한 디테일(가령 냉장고에 남편에게 고하는 아내의 메모가 붙어 있다든지..)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크롤을 내리던 손을 멈추지 않은 것은 자살 시도 후 깨어난 주인공이 불현듯 덮쳐오는 궁기에 허덕이며 바닥에 흘린 자신의 피를 허겁지겁 핥아먹는 장면의 그로테스크함에 매료되었기 때문이었다. 작품의 정체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대목이었다.
이후 이야기는 급전개의 물살을 타기 시작한다.
“심신으로 따지자면 심의 일부와 신의 전체가 내가 아니기에, 나는 지금의 나를 타인으로 정의하기로 했다. 그러니,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살인이면서도 살인이 아니다. 어쨌든 나는 인간을 죽이는 것이 아니니까.”
장르물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기 전에 자살을 결심하는 인물은 종종 볼 수 있는 클리셰인데, <흡혈귀는 죽어야 한다>의 주인공은 이를 주체와 객체로 상정하여 타인을 죽이는 행위로서 인식하는 독특한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심신의 완전한 주체였던 ‘나’가 심(心)의 일부로서만 존재하게 되자, 심의 나머지와 신(身)을 하나의 객체이자 살해 대상으로 간주하게 된 것이다.
이때 주인공이 밝히는 살해 동기가 무척이나 흥미롭다.
“변모한 나란 존재는 법의 심판을 받는 것이 불가능하다. 들짐승을 법으로 심판하지 못하듯, 나를 법으로 다스릴 순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이 쌓아 올린 사회와 법에 대한 모독이다. 그러니 내 손으로 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아닌 자는 인간의 법으로 다스릴 수 없고, 인간이 아닌 자에게 인간의 법을 들이대는 것은 도리어 인간이 구축해 온 시스템에 대한 모독이라는 것. 인간이라는 종의 정체성을 관계망 속에서 찾고 있는 시각이라고 볼 수 있다. 때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곡식의 티끌이나 쭉정이를 골라내는 키질처럼 불순분자를 솎아내는 시스템이지만, 그것이야말로 인간이라는 종의 근원이라는 관점은 주인공이 흡혈귀가 되어가는 과정과 더불어 앞으로의 전개에 흥미를 돋운다. 이쯤 되면 이제 주인공의 결심은 가족의 상실이라든지 죄책감 따위와는 무관하며, 단지 자신이 더 이상 인간일 수 없기에 죽어야만 한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인간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어도, ‘인간’이라는 표지가 개인의 생사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은 자명해 보인다.
인간의 구성 요소를 몸과 정신으로 구분하는 이원론에 바탕을 두고 있는 이 작품은 주인공이 완전한 흡혈귀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점차 인간성을 잃어 가는 모습을 치밀하게 묘사한다. 하드웨어가 바뀌었으니 소프트웨어에도 일종의 업데이트가 이뤄지는 셈인데, 인간으로서의 영혼과 야수의 본능을 각각 지각하는 주인공의 심리 묘사가 인상적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흐름에 긴장감이 없고 다루고자 하는 철학적 사상과 시각이 두드러지다 보니 전체적으로 지나치게 설명조를 띠는 것은 작품에 치명적인 단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장편에 어울리는 세계관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확립된 작가의 주제 의식이 일종의 데모 버전을 위해 단편이라는 작은 그릇에 욱여넣어진 데 따른 부작용일 것 같다. 보다 큰 그릇에 담긴다면 보스몹으로 보이던 연지홍이 과도한 친절만 베풀다 허망하게 죽는 것보다는 한결 나은 선택을 할 수도 있으리라.
한편 완전한 흡혈귀로 각성한 주인공은 마침내 드디어 가족에 대한 의미를 찾게 되는데, 그동안 주인공이 가족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따로 묘사되지 않은 탓에 반전의 묘미가 살짝 떨어지기는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자아와 흡혈귀로서의 자아가 명확히 구분되는 지점을 제시함으로써 작품에 내재한 인간관이 무엇인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 된다.
이는 다름 아닌 생명에 대한 인식의 차이인데, 개인의 목숨 연장에 희생된 다른 존재에 대한 상반된 관점이 인간과 흡혈귀를 구분 짓는 잣대가 되는 것이다. 인간은 다른 생명을 앗아가며 살아가는 것에 너무도 익숙해진 나머지, 인간을 위해 희생된 다른 생명의 죽음을 들여다볼 계제를 마련하지 못한다. 하지만 흡혈귀가 된 주인공은 자신의 목숨을 위해 희생된 가족의 죽음에 고마움을 느낀다. 설사 그들을 죽인 것이 자신이라 하더라도 그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그들의 죽음에서 의미를 찾으며, 그들의 희생으로 얻게 된 새로운 삶의 기회를 스스로 파괴하려던 선택을 거두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이 역시 어찌 위선이자 모순이라 하지 않을 수 없겠는가. 작품이 이렇게 끝났다면 조금 밋밋했을 것임을 알았는지 작가는 몇 가지 장치를 덧댔는데 연지홍과 지인화 두 인물이 바로 그것이다
연지홍은 주인공을 흡혈귀로 만든 장본인으로, 인간성을 유지한 채 몸만 흡혈귀가 된 인물이다. 인간의 무리에 섞이지도, 흡혈귀와 어울리지도 못하는 주변인으로서 고독에 못 이겨 살육을 저지르고 다닌다는 설정은 인간이라는 종의 정체성을 사회와 관계에서 찾는 관점과 맞닿아 있으며, 다른 이의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 인간의 위선과 모순을 단순명쾌하게 보여주는 역할로서도 기능한다. 주인공과 유대관계를 쌓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에 잠시 설레다가도, 그가 결국 완전한 흡혈귀가 되어 자신을 떠나고 나면 다시 혼자가 되리라는 사실에 서글퍼하는 장면에서 그녀의 캐릭터성이 부각되지만, 알서 말한 대로 모두 지나친 설명으로 제시되고 있기 때문에 그 매력을 다소 잃는다.
인간의 영혼을 지닌 흡혈귀 연지홍과 인간에서 마침내 흡혈귀로의 승화를 거친 주인공을 모두 죽인 인간 지인화가 실은 흡혈귀의 피를 정제한 혈청을 사용하며 부작용을 겪고 있다는 에필로그는 가히 반전이라 할 만하다. 독자들은 이 대목에서 이 세계관의 중심축이 실은 인간도, 흡혈귀도 아닌 중간자 지인화라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으리라. 그녀는 인간의 편에 선 심판자이자 사형집행인이지만, 그 방식은 인간의 시스템을 초월한 지 오래이며 영혼마저 점차 소실되어 가고 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중간자로서 하나의 정의를 기치로 내세운 그녀의 다음 칼날은 과연 어디로 향할 것인가? 양쪽 진영에 속하지 못하는 중간자를 주인공으로 두는 수법은 흡혈귀 소재의 스토리텔링에서 자주 볼 수 있다. <블레이드>나 <데이브레이커스>, <언더월드> 등이 그랬다. 클리셰로 볼 수도 있지만, 정체성이나 종의 다양성 등 섣불리 어느 한쪽의 편을 들 수 없는 상황에서 독자가 주인공과 함께 고민하고 생각하게 하는 방법으로서는 탁월하지 않을 수 없다.
초장에 언급한 준식 의 소설에서 엿본 조금 다른 시각이란 것도 바로 이것이다. 중간자 지인화는 이제 어떤 편에 서게 될 것인가. 어찌 됐든 결국에는 인간으로 회귀하리라는 믿음에 따라 인간의 편에 남을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인간도 흡혈귀도 아닌 새로운 종의 탄생을 예고하며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 나갈 것인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무언가를 소설은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