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1
<제발 조금만 천천히>에서 다뤄지는 좀비는 속도라는 측면에서 착안하여 독특한 상상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작품이다.
어느 날 깨어나 보니 세상의 사람들이 사라져있었다. 사귄 지 채 10일이 안 된 남자친구에게 성적인 요구를 받아,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스트레스로 과음을 한 후였다. 그런데 그에게 긁혔는지 손등은 좀 까져 있었다. 채하는 숙취와 목마름에 편의점을 갔다 오나, 어쩐지 엘리베이터가 너무 빠르다거나, 편의점에 사람이 없는 등 기묘한 현실을 마주한다.
그렇게 집으로 올라오니 지원이 있었고, 채하은 어젯밤 지원에게 키스한 것을 떠올리며 부끄러워하지만, 지원은 개의치 않는다. 대신 지원은 밖에서 누가 목이 잘려 죽었다면서 채하에 집에 들어가 몸을 숨긴다. 그렇게 밖을 내다보니 희미한 형체들이 다가와 시체를 치우고 사라진다.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켠 라디오에서는 이 라디오를 들었다면 우리들은 완인이 되었다면서 공원에 모이자고 이야기한다.
공원에 간 채하과 지원에게 빨간 모자의 사람은 소수인 우리 완인을 제외하고는 상대적으로 엄청나게 빨라진 다수의 속인들이 되었다며 의사소통도 되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완인 살인 사건을 계기로 완인들의 생존권을 보장하자며 투쟁하기로 한다. 그러나 곧 속인들이 와 학살이 벌어지며 두 사람은 도망친다.
그 다음 아침 일부 완인들은 속인이 되어 구원을 받아야 한다며 속인들에게 일종의 투신자살 시위를 벌인다. 그러던 중 채하은 ‘아이를 바쳐야 한다’라는 이야기가 들리자 그들에게 들려가던 아이인 예빈을 구출한다. 그렇게 세 사람이 된 일행은 예빈의 배고프다는 이야기에 홈플러스로 향한다.
그 곳에서 1++ 한우 생고기를 먹으며 배를 채우던 세 사람에게 속인이 다가와 예빈을 잡는다. 예빈이 죽게 될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채하은 속인의 목덜미를 물게 되고, 속인이었던 사람은 완인이 된다. 그렇게 속인을 완인으로 변하게 할 수 있음을 깨달은 완인들은 ‘빠른 시간 속에 종속’된 속인들을 해방시키며, 자신들이 좀비라고 부르는 것을 알게 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차이라는 지점에서 바라본 대립은 강렬하다.
완인과 속인은 빠름과 느림, 그 차이에 따라 서로 다른 시간선을 살아간다. 그 차이로 말미암아 서로의 소통이 단절되고 오해를 불러온다. 그 과정에서 발생한 광기 어린 비극으로 사건의 긴장감이 높아지며, 이내 파국으로 치닫는다. 그 파국이 일종의 구원처럼 비춰지는 까닭은 우리의 삶이 지나치게 편향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소설의 독특한 점은 감염의 위협에서 생존을 구가하는 기존의 좀비 플롯과는 다르게, 감염 전파자의 입장에서 소설을 진행한다. 그러면서도 폭력의 대상 역시 감염 전파자가 대상이 된다. 그 폭력의 행방은 잔혹하고도 끔찍하다. 완인들의 신체는 라즈베리 파이처럼 으깨지며, 목이 베어진 채 버려진다. 그렇게 단절로부터 파생된 폭력은 완인들을 극단적인 학살에 이르게 만든다.
이 같은 좀비의 타자성을 다루는 변주는 물론 전혀 없지는 않다. 소수자로써의 좀비, 그들의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사회의 타자에 놓이는 서사는 종종 있었다. 좀비 공민권 운동을 그린 [브리더스 : 좀비애가]가 그 예다. 이에 더하여 <제발 조금만 천천히>의 강점은 오메르타 작가의 소수자에 대한 편안한 애정이다. 채하와 지원의 관계 그리고 예빈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연대가 구원의 단초가 된다. 퀴어로써의 타자성은 완인으로써의 타자성에 흡수되며, 이들의 타자성이 세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완인 전체로 확장된다. 그리하여 그 타자성으로 말미암아 속인들의 타자 편입이 이루어지며 세상을 전복시킨다.
이 지점에서 좀비의 일반적인 양상을 몇 가지 짚어보자.
근본적인 차이는 좀비의 도래는 사회의 붕괴를 일으키며 그 이후의 생존에 초점을 맞추는 것에 반해, <제발 조금만 천천히>는 집단의 붕괴와 타자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속인과 완인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한다면 공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통의 단절로 그 과정은 요원하기만 하다. 초반부, 작 중에서 완인이 속인에게 어떤 식으로 위협이 되는지는 이야기가 없다. 단지 평범한 데모로 실력을 행사할 뿐이다. 그렇게 사건을 살인 사건을 견지한 채하의 시선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완인의 학살에 대한 대책이 나올 것이라는, 실낱같은 기대는 이윽고 망가진다.
속인들의 소통에 대한 태도는 또 다른 곳에서도 드러난다. 빨간 모자를 쓴 남자가 자기 아들과 필담으로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속인은 끝내 대화를 포기한다. 이런 면면에서 완인들의 양상은 고전적인 좀비처럼 다뤄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 고전적인 좀비의 양상은’죽여도 되는’에 초점이 맞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타자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결과물로도 해석된다. 속인의 시선은 이를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
소설은 이 지점에서 ‘죽여도 되는’을 비튼다. 완인들은 좀비로 불리더라도 이성이 있고 합리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인간이다. 단지 소통이 단절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좀비로 낙인 찍혀진 완인들은 이유 없는 학살을 당한다. 완인의 시선에서 비치는 이 학살 속에서 좀비들은 소수자로서의 타자가 된다.
오히려 빠름의 시점에서 속인의 모습은 맹목적인 좀비의 모양새에 가까워 보인다.
현대의 좀비의 속도는 빨라졌다. 좀비 포맷 하에 이뤄지는 양상들은 더 빠르고 더 위협적으로 변모되어왔다. 그 것은 일종의 신자유주의의 유동성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제발 조금만 천천히>에서 다뤄지는 좀비는 느리다. 그런 점에서 발 빠른 존재들인 속인을 오히려 좀비로 보는 것이 비약일까. 후지타 나오야는 좀비 사회학에서 근대 좀비의 성질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21c 좀비] (2001~)
1. 발이 빠르다.
2. 사람을 덮친다.
3. 감염된다.
4. 발생 원인은 뇌에 미치는 어떤 작용이다.
5. 집단을 형성하는 경우도 있다.
6. 이성을 가진 경우도 있다.
7. 관리나 공존이 가능한 존재로 그려진다.2
속인들의 상황에 각 요소들을 대입해보면 상황은 명징하게 드러난다. 발이 빠르며, 완인들을 덮치고, 집단을 형성하며, 이성을 가졌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전염된 것은 무엇일까. 다음의 묘사를 보면 속인들의 좀비적 형질은 작 중에서는 ‘혐오’로 그려진다.
가뜩이나 약자나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만연하던 최근의 사회 분위기를 감안하면 이 하찮은 버러지들을 짓밟아버리자고 주장하는 패거리가 몰려와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이었다. (중략)
그렇게 가정한다면 뇌에 미치는 어떤 작용까지 완전히 맞아떨어진다. 이 지점에서 속인들에게 ‘사회적 강자에 속하는 측이 약자에게 포위되어 공격받고 있는 듯 피해자 의식을 느끼고, 자신의 폭력성과 횡포함을 타자의 공격인 것처럼 파악하는 매커니즘3‘이 반영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과연 비약일까.
혐오는 확산되며 사람들에게 전염된다. 그렇게 낡은 개념인 혐오는 오늘날엔 ‘좀비처럼 죽은 동시에 살아있다.‘4 우리는 혐오를 경계하면서도 동시에, 우리가 혐오하는 것이 혐오인지를 완전히 인지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완인들의 해방의 기저에서 ‘사랑’과 ‘연대’가 있다는 것은 이 혐오와 대조 된다. 그렇게 작품에서 혐오에서 해방되는 메타포가 깊게 각인되어 있는 것은 세상에 대한 약간의 희망과 애정이 아닐까.
결과적으로 <제발 조금만 천천히>는 다양한 부분에서 좀비의 클리셰를 변주하는 작품이다.
작 중 완인들은 비이성적이고 맹목적인 ‘적’이 아닌 이성이 있고 소통도 불완전하게나마 가능한 존재로써 그려진다. 그러나 이들은 혐오로 인하여 타자가 되어, 소수자로써 생존을 위해 투쟁하게 되면서 테마를 변주한다. 또한 혐오라는 지점에서 완인이 아닌 속인들에게 좀비의 테마를 부여함으로서, 일반적인 좀비 플롯의 구도를 역전시킨다. 이 과정을 사랑과 연대를 중심으로 풀어냄으로서, 진정으로 누가 좀비인지를 조망하게 한다는 점에서 뜻 깊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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