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한국의 드라마가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고, 한국의 대중음악이 ‘케이팝’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 사람들의 사랑을 받지만, 불과 십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시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콘텐츠는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들이 많았다. 나 역시 어릴 때부터 일본의 소설, 만화, 영화, 드라마 등을 보면서 자랐는데, 그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탓이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일본의 전통 설화나 귀신 이야기를 한국의 전통 설화나 귀신 이야기보다 훨씬 친숙하게 느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테라리엄의 소설 <호귀>를 읽으면서,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한국의 전통 설화나 귀신 이야기를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울면 부모가 ‘호랑이가 잡아간다’며 어르는 모습이라든가,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여자를 종종 여우에 빗대는 것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문제가 있을 때 무당이나 박수를 찾아가 의견을 묻는 사람은 여전히 많다. 신내림, 신병 같은 현상은 왜, 어떻게 일어나는 것인지는 아직도 과학적으로 규명되지 않았다. <호귀>에는 이 모든 게 나온다. 심지어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문학 작품 중 하나인 박지원의 <호질>과도 연결된다. 사방에 이야기가 있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호귀>는 소설 구성의 3요소인 인물, 사건, 배경이 모두 매력적인 작품이다. 주인공 박출은 <호질>을 쓴 조선 후기 실학자 연암 박지원의 아들이다. 박지원의 아들이라는 설정만으로도 흥미로운데, 하필 그 아들이 유교 사상을 따르고 무속 신앙을 배격하는 양반 가문에서 인정하기 힘든 박수(남자 무당)가 되는 바람에, 양반 가문의 자손이며 부모가 살아계시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집에서 쫓겨나 조선 팔도를 유랑하며 사는 신세로 전락한다는 점이 비장한 매력을 띤다.
청년이 된 박수는 호랑이가 산에서 내려와 마을 사람들을 해친다는 연락을 받고 호산촌으로 향한다. 이때의 호랑이는 인간을 해칠 수 있는 위협적인 맹수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호산촌에 도착한 박수가 착호군 우두머리의 딸 산영과 만나면서 호랑이는 인간이 함부로 해쳐서는 안 되는 신성한 영물로 격상된다. 한편 호랑이 가죽을 탐내는 천기후나 호랑이를 만만하게 보는 현령 같은 이들은 호랑이의 신성성/위험성을 모르는 무지하고 오만한 이들로 그려진다.
사건의 중심에 있는 호랑이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즉 큰 위험을 부담할수록 큰 보상이 따르는 대상이다. 천기후 같은 이들은 호랑이 가죽을 얻을 수만 있다면 사람 목숨 한둘쯤은 희생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 또한 큰 위험, 큰 보상이지만, 박수와 산영의 생각은 달랐다. 이들은 호랑이를 해치는 것보다 호랑이를 지키는 편이 인간들에게 이롭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견해의 차이, 태도의 차이가 인물 간의 갈등을 극대화하고 사건 전개에 긴장감을 더한다.
공간적, 시간적 배경이 분명하고(조선 영정조 시대) 박지원과 <호질>이라는 구체적인 인명과 작품명이 등장하지만,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나 전개는 판타지의 그것에 가깝다. 인간이지만 인간 아닌 존재들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박수와 산영, 인간은 아니지만 인간의 모습을 할 수 있는 여우와 다람쥐들, 그리고 호랑이이지만 인간의 말을 하는 창귀나 육혼 등의 존재는 일본의 음양사나 요괴(바케모노), 서양의 엑소시스트나 늑대인간 등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 전통 설화에서 더 많은 귀신(아귀)들의 이야기가 발굴되고 재해석, 재창조되었으면 좋겠다.
집안에서 내쳐진 아이가 집안을 구하고, 이웃에게 외면당한 아이가 마을을 구하고, 인간에게 무시당한 존재들이 인간들을 구하는 이야기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생명에는 귀천이 없고 인간과 동물의 목숨값이 다르지 않다는 걸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들의 말로를 보여주는 소설이라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무엇보다 재미있다는 것, 읽으면 읽을수록 다음 전개가 궁금해진다는 것이 이 작품의 매력이다. 영화나 드라마로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