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는 전 세계에서 가장 대중적인 장르문학 중 하나다. 수수께끼를 놓고 독자와 작가가 벌이는 치열한 지적 게임은 미스터리의 특별한 매력이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에서 미스터리는 유독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현재 가장 큰 이유로 꼽히는 것은 미스터리가 장르 소설 시장 전반을 장악한 웹소설과 상성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이다. 모바일 환경과 회 단위 연재에 최적화하기 위해 가독성과 쉽고 흥미로운 전개를 염두에 두고 생산되는 웹소설과 달리 미스터리는 독자와의 치열한 지적 게임을 염두에 둔 정교한 플롯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1 물론 최근에 여러 공모전이 개최되며 다양한 미스터리 작품을 발굴하려는 시도가 보이고 있지만, 대부분 장르에 충실한 미스터리라기보다 미스터리의 플롯이나 서스펜스만을 활용한 작품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그 때문일까? 하고 많은 미스터리 종류 중에서도 정통미스터리를 택해 웹소설 속으로 끌어들인 <추리소설 속 피해자가 되어버렸다.> (이하 <피해자>)의 시도가 더욱 돋보이는 것은. ‘재미있는 웹소설이면서 충실한 미스터리일 수 있는가?’에 대해 과감한 실험을 감행하는 <피해자>는 여러모로 영리하고 흥미로운 소설이다.
우선 <피해자>가 미스터리와 웹소설의 불협화음에 주목하기보다 여러 가지 장르를 혼합 할 수 있는 웹소설의 장르 교섭적 특성에 주목하여 해결책을 도모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웹소설은 급격하게 변화하는 독자들의 기호를 반영하고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 독자층을 유입하기 위해 기존 장르의 문법에 얽매이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2 <피해자>는 다양한 장르의 교섭을 적극적으로 시도하는 웹소설의 잡식성을 믿고 ‘책빙의물’3과 ‘정통미스터리’의 만남을 성사시켰다. 그리고 각 장르가 지닌 장르 규칙들을 존중하면서도 영리하게 전복해가며 새롭고 신선한 전개를 이끌어낸다. 다소 거칠게 요약하자면 <피해자>는 ‘명탐정 윌 헌트’ 시리즈의 ‘밀른 가문의 참극’이라는 제목을 가진 추리소설 속 피해자에게 빙의한 주인공 레나가 원작을 비틀고 범인을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의 소설이다. 레나는 ‘책빙의물’의 장르 규칙에 충실하게 원작에서 예정되어 있는 불행한 운명을 벗어나고자 책 속 지식을 열심히 활용한다. 하지만 이것은 곧 ‘미스터리’의 장르 규칙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문제가 되고 만다. 앞서 이야기 했듯 미스터리는 독자들과의 치열한 지적 게임이기에, 초자연적인 능력이나 불가사의한 수단과 같은 반칙을 사용해선 안 된다.4 그런데 하물며 ‘책빙의’라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통해 원작의 범인과 범행 트릭을 모두 알고 있는 주인공이라니! 애초에 이것이 미스터리가 될 수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워지는 부분이다. 하지만 <피해자>는 능청스럽게도 첫 화가 시작되자마자 원작의 범인을 죽여 버림으로써 문제를 해결해낸다. 원작의 범인이 죽은 이상 원작의 이야기는 모두 뒤틀려 버렸고 주인공이 알고 있던 ‘초자연적인 선행지식’은 오히려 추리의 걸림돌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될 뻔 했던 주인공 역시 <셜록 홈즈>시리즈의 ‘왓슨’처럼 명탐정을 빛내주는 어리석은 조력자로 강등된다. 위반 되었다가 다시 회복된 미스터리 장르규칙은 주인공의 선행 지식을 바탕으로 더욱 복잡하고 흥미로운 수수께끼로 거듭난다. 문제는 <피해자>가 충실한 미스터리에는 한 발짝 더 가까워졌지만 재미있는 웹소설에서는 멀어질 위험이 생겼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더욱 복잡해진 수수께끼는 가독성을 중요시하는 웹소설 독자들에게 외면 받을 가능성이 있을뿐더러,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서 벗어난 레나가 어리석은 조력자역할에 너무 충실한 나머지 주인공으로서의 매력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하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이러한 문제들을 헤쳐 나가기 위해 또 한 번 장르규칙을 전복시키는 위험을 감수한다.
정통미스터리에서 로맨스는 사건 진행과 관계없는 감정들로 순수한 지적 경험에 혼란을 줄 수 있기에 금기시되어 왔다.5 하지만 <피해자>는 원작의 주인공인 명탐정 윌과 로맨틱한 관계였던 윌의 임시 조수 자리에 레나를 앉힘으로서 로맨스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윌과 레나가 로맨틱한 관계로 발전할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은 ‘로맨스 판타지’장르에 익숙한 웹소설 독자들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새로운 긴장감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피해자>는 로맨스적 흥미를 위해 지적 경험에 대한 혼란을 감수하기로 한 것일까? 놀랍게도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윌은 레나를 신경 쓰는 듯 보이면서도 사건이 해결되는 순간까지 그녀가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거두지 않기 때문이다. <피해자>에서 암시한 로맨스의 가능성은 싹을 틔우기는커녕 끊임없이 윌의 진의를 의심하며 더욱 열심히 범인을 찾아야 하는 이중의 긴장감 속으로 레나를 몰아갈 뿐이다. 이제 문제는 두 사람의 로맨스를 기대했던 웹소설 독자들에게 날아올 배신감어린 눈빛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피해자>는 장르적 특징을 사용해 이 위기를 기다렸다는 듯 기회로 바꾸어버린다. ‘책빙의물’은 엑스트라가 주인공으로 바뀌면서 원작이 가지고 있던 기존의 이야기 구조를 재해석하게 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6 <피해자>는 명탐정인 윌이 범인을 지목했음에도 레나가 빙의를 끝내고 책 속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을 설정함으로써 원작을 다시 한 번 비튼다. ‘어리석은 조수’였던 레나는 명탐정의 추리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추리소설 독자로서 익힌 미스터리 장르 규칙들과 임시 조수로서 알게 된 정보들을 조합하여 진범을 잡아내는 활약을 펼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레나는 그에 대한 대가로 신에게 윌과의 멋진 로맨스와 정식 조수자리를 제안받기까지 하지만 그 달콤한 제안을 멋지게 차버린다. <피해자>는 레나가 윌의 조수나 연인이 아닌 그의 라이벌, ‘탐정 레나 브라운’이 되기로 선택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원작을 멋지게 재해석하고 ‘로맨스는 이용당했다’며 배신감에 떨던 독자들의 마음을 돌려놓을만한 주체적인 여성상을 그려내는데 성공한다. 또한 완전히 재구성된 <피해자>의 결말은 ‘기이한 사건, 탐정에 의한 논리적 추리, 뜻밖의 결말’이라는 미스터리의 3대 구성의 마지막 조건까지 충족시키며. 웹소설과 정통미스터리 장르의 조합에서만 맛볼 수 있는 신선함을 독자들에게 선사한다.
모든 실험적인 작품이 그렇듯이 <피해자>가 웹소설 독자와 미스터리 독자 모두를 완벽하게 만족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피해자>가 시도한 두 장르의 조합법은 분명 흥미롭고 유의미하다. 새로운 독자층을 유입할 수 있는 신선한 콘텐츠를 찾는 웹소설 측에게도, 정보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현대사회에서 관찰과 추론만으로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던 정통미스터리 측에게도 <피해자>는 큰 기회와 영감을 제공한다. 이제 <피해자>를 시작으로 풍부한 가능성을 가진 두 세계를 이어주는 더욱 다양한 조합의 징검다리들이 나타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