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어떻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걸까. 활기차게 보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할 게 없어 매일매일이 지겨운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무 생각없이 이리저리 떠밀리며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여기 <고기>에 등장하는 ‘나’가 있다. ‘나’는 친절축산이라는 동네 정육점의 주인이다. 보편적으로 정열, 활력을 의미하는 붉은색으로 둘러싸인 작업장에서, 나는 오롯한 회색빛 생물로 존재한다. ‘나’는 열정도 없이 희망도 없이 무미건조한 매일매일을 보낸다.
그저 살아있으니까 생계를 꾸려나간다는 느낌으로 시간을 보내던 ‘나’는 어느 날 심계항전으로 죽음을 맞는다. 서술자는 죽은 ‘나’지만, 죽은 사람이 화자가 되었다고 해서 사후세계에 관해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담담한 목소리로 자신이 살아온 과거의 나날들을 서술한다. 과장이나 과도한 슬픔, 격앙된 분노 등의 격렬한 감정은 느껴지지 않는다. 살아있을 때처럼 죽은 이후에도 ‘나’는 회색빛 무언가로 존재하는 것 같다. 작품을 읽을수록 ‘나’는 그저 무채색의 살아있는 고깃덩어리처럼 느껴진다. 아, 물론 중간에 죽은 상태로 변화를 주긴 했다.
‘나’가 무심한 손길로 돼지고기와 소고기를 썩썩 썰어 진열하는 과정은 단순한 정육작업으로 보이지 않았다. 고기를 손질하면서 본인의 삶에 존재하던 다채로운 무언가를 베어내는 하나의 의식처럼 보였다. 분명히 살아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정물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주는 ‘나’와 상품으로써 정육점 안에 진열되어 있는 고깃덩어리가 오버랩되는 이유도 위와 같은 것이 아닐까.
도대체 무엇이 ‘나’에게서 생기를 뺏아갔는지 읽는 내내 궁금했다. 보통 사람들에게 주요 관심사로 작용하는 가족, 친구, 직장, 미래 그 어떤 것에도 미련을 보이지 않으려면 어떤 과거를 갖고 있어야 하는 걸까. 그러나 아쉽게도 내가 읽은 곳까지 명확한 이유는 드러나지 않았다.
‘나’가 끝까지 죽은 고깃덩어리로 느껴질 것인지, 아니면 생기있는 고깃덩어리로 느껴질 것인지 상상하며 읽으면 무척이나 재미있겠다. 작가님이 앞으로 어떤 전개를 보여주실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