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의 끝에서 공포를 느끼는 자. 전부 유죄. 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해저도시 타코야키 (작가: 김청귤, 작품정보)
리뷰어: 김시인, 22년 1월, 조회 307

코로나 팬데믹이 세계를 뒤덮은 이후, 전문가들은 이것이 일시적인 전염병의 유행이 아니라 인간이 기술진보를 앞세워 자연을 무분별하게 파괴해온 탓에 도래한 생태 위기라고 진단했다. 지금 태어나는 세대가 지구의 마지막 인류가 될 것이며 22세기는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암울한 미래 예측은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한다. 멸망이라니. SF에서만 봤던 디스토피아가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다니! 게다가 인류를 공포에 몰아넣은 이 코로나 시기가 자연에게 있어선 달콤한 휴식기라는 아이러니는 우리에게 낯선 소외감을 안겨준다. 공장이 멈춘 동안 크게 개선된 대기 오염과 인적 끊긴 장소에 돌아오기 시작한 멸종 위기 동물들의 소식을 듣고 있자면 문득 이런 생각이 엄습해오기 때문이다. 어쩌면 앞으로 도래할지도 모를 멸망은 오직 인간에게만 예정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항상 주체의 입장에서 자연을 착취해온 인간이 이젠 타자의 자리에 서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아니, 어쩌면 인간이 주체의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는 이상 멸망은 막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박감. <해저도시 타코야키>의 상상력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해저도시 타코야키>의 공간적 배경은 멸망 직전의 지구에서 탈출한 사람들이 만든 해저도시 ‘태양’이다. 그렇다. 해저도시 ‘타코야키’가 아니라 ‘태양’이다. 왜 소설의 제목과 달리 해저도시의 이름은 ‘태양’이 되었을까? 동그랗게 생긴데다 뜨겁다는 것 말고는 닮은 것도 없어 보이는데 말이다. 해저도시 ‘태양’에 대해 알아갈수록 그 의문은 깊어져만 간다. ‘태양’을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주체와 타자가 철저하게 구별된 도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다, 도시 외곽, 도시 중심부가 두터운 돔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단절되어 있으며 중심에서 외곽으로 밀려날수록 한정된 자원 분배에서 배제되고, 도시를 유지하기 위해 착취당하는 입장에 놓인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이들 중 인류가 버리고 떠나온 바다야말로 가장 소외된 타자임은 말할 것도 없다. 바로 여기가 ‘태양’과 ‘타코야키’의 간극이 사뭇 두드러지는 부분이다. 자고로 타코야키란 바다 출신의 문어가 핵심이고 밀가루 반죽은 조연에 머물지 않던가. <해저도시 타코야키>는 이 간극에 지구 멸망의 중차대한 비밀이 있음을 짚어낸다. ‘바다는 계속 뜨거워지고 있대요. 지구가 아파서 깊은 바다로 도망쳐왔으면서, 여전히 해저도시에 필요한 에너지를 만들고 그 열기를 바다에 보내고 있다고 했어요.’ 라는 주인공의 증언은 그 사실을 증명한다. 인류는 눈부시게 발전한 과학기술로 멸망을 피해 해저도시를 조성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작 멸망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을 두고 오지 못했다. 인간을 이성적인 주체로, 자연을 물질적인 타자로 분리하여 통제하고 착취해 온 인간중심적인 경향 말이다. 그렇다면 <해저도시 타코야키>는 오랫동안 주연 자리를 꿰차고 있던 인류가 멸망을 향해 추락하는 슬픈 이야기일까? 놀랍게도 그렇지 않다. <해저도시 타코야키>는 인류가 주인공의 자리에 앉아 ‘우린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라며 비장하게 인터스텔라의 명대사를 내뱉을 기회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건 오히려 만년 조연자리에 머물러야만 했던 타자의 대역전극이다.

 

<해저도시 타코야키>의 주인공은 중심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돔 벽 청소부 ‘문-AT0914(이하 문)’이다. 문어의 세포를 받아 ‘문어 문’씨가 되었다는 그 이름의 유래는 ‘문’이 자연과 인류의 경계에 놓인 존재임을 상징한다. 반쯤은 인간이라지만 해저도시 ‘태양’에서 ‘문’은 결코 인간적인 대우를 받지 못한다. 최대 수명 3년에 오로지 돔 벽 청소를 위해 태어나 죽으면 다음 인공인간의 재료가 될 뿐이라니. 해저도시의 부속품으로서 살아온 ‘문’이 평생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중심부보다 죽어버린 바다를 더욱 친근하게 느끼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문’과 바다 사이에 존재하는 타자라는 슬픈 공통점은 ‘문’이 돔 벽에서 발견한 빛나는 식물을 죽이지 못하도록 만든다. 아무리 바다가 살아나는 신호일지 모른다지만 식물 살리자고 폐기처분의 위험까지 감수하다니. 중심부 사람들의 눈에 ‘문’의 결정은 비합리적으로 보일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것은 인류가 이미 상실한 사랑, 대화, 체온, 음악과 같은 합리 너머의 것들을 간직한 ‘문’의 작지만 용감한 반항이다. 그리고 ‘문’의 선택은 나비의 날갯짓처럼 ‘태양’의 견고한 벽에 균열을 일으키고 이성과 과학이 만들어낸 도시에 낯선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시작점이 된다. 해저도시에 있을 턱이 없는 타코야키 트럭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다. ‘문’은 수상쩍은 타코야키 트럭의 주인 ‘루나’와 함께 마치 전염병을 퍼뜨리듯 해저도시 전역에 타코야키를 전파한다. 처음엔 낯설어 하던 사람들은 이윽고 너무 맛있어서 무서울 정도라는 타코야키의 맛에 푹 빠져버린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환상적인 타코야키 맛의 핵심은 중앙을 떡하니 차지한 문어, 즉 바다라는 사실이다. 인류가 항상 주체였던 질서와 관습에 충격을 가하고 전복시키는 타코야키를 먹으며 사람들은 가랑비에 옷 젖듯 그 새로운 질서를 흡수하게 된다. 그 결과, 중심부 사람들이 루나와 타코야키 트럭을 통제하고 독점하려 할 때쯤에 자연은 이미 타자의 지위에서 벗어나 강력한 모습을 회복한다. 무리를 이루어 크게 자라난 빛나는 식물은 ‘태양’의 견고한 돔 벽을 산산이 부수고 마침내 자연과 문명의 경계를 허물어버린다. <해저도시 타코야키>는 루나와의 키스로 완벽한 문어가 된 ‘문’의 시선을 통해 이 멸망의 풍경을 아름답게 묘사한다. 갑작스럽게 밀어닥치는 바닷물에 우왕좌왕하던 중심부의 인간들은 이윽고 물고기, 산호, 말미잘 등 그들 자신이 타자라 여겼던 모습으로 변해버리고, 문어의 세포를 가지고 있었던 외곽의 청소부가 짓는 생전 처음 보는 환한 웃음은 동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또한 바다 어딘가에 있는 다른 돔들도 부수어 인간으로 인해 죽은 바다를 인간을 통해 되살리겠다는 ‘문’과 루나의 예고는 ‘해저도시 태양’이 아니라 타자에 의해 전복 된 ‘해저도시 타코야키’가 점점 더 늘어날 것이라는 짜릿한 기대감마저 선사한다.

 

<해저도시 타코야키>의 진가는 우리가 이 소설의 종장에서부터 두 가지 상반되는 감정을 맞닥뜨리게 한다는 부분에서 드러난다. 주인공인 ‘문’의 편에 서서 본 결말은 분명 동화처럼 아름답고 통쾌하지만 한편으로 아주 불편하고 알 수 없는 공포를 느끼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 이중적인 감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새삼스러운 깨달음이 찾아든다. 이 공포는 우리가 부정할 수 없이 문어의 세포라곤 조금도 가지지 못한 ‘중심부의 인간’이며 이 멸망의 당사자이기에 느껴지는 언캐니라는 깨달음 말이다. 그것은 우리를 ‘해저도시 타코야키‘에서 쫓겨난 불법체류자처럼 두렵고 외롭게 만들지만, 다행스럽게도 ’문‘과 함께 한 여정은 우리의 손에 멸망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만큼은 남겨주었다. 그리고 그 방책이란 최첨단 과학기술이 적힌 도면도, 망가진 지구를 대신해 줄 새로운 터전이 그려진 지도도 아닌, 주인공의 자리에서 겸손히 내려오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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