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힘으로 한 끼 식사를 차려본 일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메뉴를 구상하고 장을 보고 재료를 씻고 다듬고 조리해서 그릇에 담고 다 먹은 상을 치우고 정리하는 일이 얼마나 수고로운지를 말이다. 이 지난한 과정을 수십 년 동안 해낸 사람들은 남다른 체력과 인내력, 지구력의 소유자라고 칭송받아 마땅할 것이다. <삼시세kill>의 주인공 이보배가 그렇다.
이보배는 72년을 살면서 52년 동안 매일 남편 기봉을 위해 일주일에 두 번 장보고 하루 세 끼를 차렸다. 때로는 지치고 힘들었지만 그 자신이 먹기 위한 일이기도 하고 가정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불평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감염병이 돌기 시작했다. 감염의 결과 ‘죽어도 죽지 않는 자들’이 출몰했다. 피난이 시작되어 인구 천 만의 수도 서울이 명절 때처럼 텅 비었다. 식재료 수급이 원활하지 않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보배는 목숨을 걸고 마트에 가고 범법 행위인 걸 알면서도 이웃집 냉장고를 털었다. 무슨 일이 생겨도 남편을 먹이고 가정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한 번 제압을 해 본 이후에는 감염자들을 만날 일이 기다려졌다. 보배는 아주 힘이 세진 기분이었다. 권력이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이보배는 생전 안 해본 행동을 한다. 살아있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감염자들을 겁도 없이 힘으로 밀치고 쓰러트린 것이다. 그 때마다 이보배는 전에 느껴본 적 없는 ‘쾌감’, 누구와 싸워도 이길 수 있을 만큼 ‘힘이 세진 기분’을 느낀다. 마침내 자신의 힘을 각성한 것이다.
문제는 이 다음이다. 자신의 힘을 각성한 이보배는 여전히 남편 기홍을 위해 밥상을 차린다. 남편이 자신을 감염자라고 의심하고 자신 몰래 피난을 떠나려 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도 계속해서 그런다. 남편에게 복수하지도, 남편을 두고 떠나지도 않는다. 이는 이보배 나름의 복수인가 아니면 체념인가. 내 생각에 이보배는 “어떤 무시무시한 것으로도 때려잡을 수 없는 가장 무서운” ‘습관’이라는 병에 걸린 인물 같다. 이보배는 남편 이전에 습관의 노예다. 동지에는 팥죽을 꼭 먹어야 한다고 믿는 점, 방송국 직원을 죄다 남자로 상상하는 점, 10년 넘게 한 장지갑을 사용하는 점, 소파 한 쪽 스프링이 내려앉아도 바꾸지 않는 점 등이 그 증거다. 50년 동안 한 남자를 위해 군말 없이 삼 시 세 끼를 차려낸 것도, 남편을 먹이고 가정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유일한 소명이라고 믿는 것도 습관의 산물로 보인다. 그러한 습관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본성? 가정? 교육? 문화? 제도?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은 자들은 죽어 마땅했고 죽어도 죽지 않는 자는 이렇게 해서라도 살아야 했다.
처음에는 이보배를 구병모의 소설 <파과>에 나오는 60대 여성 킬러 ‘조각’과 비슷한 캐릭터로 상상했다.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이보배는 조각과 달랐다. 조각이 될 수 있었지만 되지 못한, 조각이 될 수 없게 만드는 조건들을 생각하게 만드는 인물에 더 가까웠다. 비록 결말이 기대만큼 시원하고 통쾌하지는 않았지만, 조각보다는 이보배에 가까운 삶을 사는 여성들이 여전히 많은 현실을 감안하면 <삼시세kill>의 설정과 전개가 훨씬 더 현실적이고 그래서 더 공포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