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부지리의 고사를 떠올리게 하는 우화입니다. 어린이가 읽기에 좋을 것 같아요. 등장하는 동물이 모두 어린이에게 친숙하고, 캐릭터도 확실합니다. 단순하고 선명한 스토리는 이 이야기가 동화로서 갖는 뚜렷한 장점 중의 하나입니다. 물론 어린이 독자를 대상으로 쓰인 이야기라고 해서 반드시 어린이에게만 어필하라는 법은 없죠. 이 작품 「달팽이와 지렁이의 경주」 또한 어른 독자에게 더 의미 있게 다가가는 지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달팽이와 지렁이의 경주’는 의미 없는 경쟁의 은유입니다. 단순히 의미 없는 걸 넘어서 경쟁의 주체를 파멸로 몰아갈 수 있는 위험한 게임이죠. 그런 게임에서 이겨보려고 스스로를 거칠게 몰아세웠다가 아파 본 경험이 있는 독자라면 이 이야기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곧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이건 그동안 뭘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남들 따라 기를 쓰고 달려왔던 우리 모두의 이야기일 수도 있죠.
평화롭게 공존하던 달팽이와 지렁이에게 개미 한 마리가 다가옵니다. 그러곤 무심하게 한 마디 건네죠. “너희 둘 중에 누가 더 빨라?” 그 말을 들은 달팽이와 지렁이는 갑자기 서로를 적대하기 시작합니다. 날 때부터 지녔던 고유의 정체성은 사라지고, 내가 상대보다 빠르다는 껍데기뿐인 자의식만 남습니다. 그 앙상한 자의식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두 동물은 결국 목표 지점을 정해 달리기 경주를 하기로 하죠.
달팽이와 지렁이가 합의한 목표 지점은 길 건너편에 보이는 썩은 나뭇가지입니다. 꽤 노골적이지요. 그 자체로는 어떤 가치도 담보할 수 없는 대상을 경쟁의 목표로 설정함으로써 그 허구성을 폭로하는 겁니다. 이렇듯 가치 없는 경쟁에 지나치게 몰입한 두 동물은 어느새 축축한 흙을 벗어나 콘크리트 길 위에 놓인 자신의 모습을 알아채지만 때는 늦었습니다. 결국 이들의 경쟁에서 최종적으로 이익을 취하는 동물은 말 한마디로 경쟁을 부추겼던 개미뿐입니다.
짐작했던 결말인데도 오싹해지는 측면이 있습니다. 볕이 쨍쨍한 날, 말라죽은 지렁이 주변에 모여든 개미떼를 보았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약간은 그로테스크한 감상에 젖게 되기도 하지요. 단순해서 더 힘 있게 느껴지는 이야기였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