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소설, 보이지 않는 존재를 비추다 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고딕의 밤_ 귀신과 함께해요 (작가: 유자서, 작품정보)
리뷰어: 글 쓰는 빗물, 20년 9월, 조회 165

유자서 작가는 ‘고딕의 밤’ 시리즈 중 하나인 <귀신과 함께해요>를 통해 보이지 않는 존재들을 말한다. 여섯 살 동우는, 멀리서 보면 집이 아니라 납작한 우유갑처럼 보이는 컨테이너에서 혼자 지낸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산동네 낡은 빌라촌에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엄마가 떠나고 아빠와 함께 차를 타고 채권자들을 피해 도망다니는 신세가 된다. 그러다 겨우 다시 찾은 ‘우리집’이 그 컨테이너 박스다. 어린 동우는 어른들에 의해 폭력에 노출되고, 방임되며, 유기된다. 그 과정에서 동우의 삶과 고통은 철저히 세상에 숨겨진다. 이렇듯 어떤 어른도, 어떤 친구도 보아주지 않는 동우의 마음과 얼굴을 보아주는 존재가 있다. 그건 바로, 외로운 동우가 불러낸 ‘베개 귀신’이다.

 

1) 나를 보아주는 귀신

 

사람은 사람으로 태어나지만, 사람으로 보아주는 이들의 시선 속에서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사람이 되어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모든 이들에게 그러한 환경이 허락되는 것은 아니다. 나를 사람으로 보아주는 사람이 없을 때, 사람은 귀신처럼 남들의 눈에 띄지 않는 존재가 된다. 내가 귀신이 되었음을 모른 채 사람들 사이에 섞인 이의 이야기는 공포물 클리셰의 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때 이들이 느끼는 공포는, 나는 정작 나를 둘러싼 이들이 귀신처럼 낯설게 느껴지는데, 그들은 나의 말에 반응하지 않고 나를 배제 시키는 데서 온다. 귀신을 만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닌, 귀신이 되는 일의 공포와 슬픔은 그것이다.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 동우와 같은 아이는 어쩌면 그래서 사람이 아닌 귀신을 불러낸다.

동우의 친부모는 자신의 고통에 매몰되어 아이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이 과정에서 동우는 감정과 욕구를 갖고 아이답게, 또 사람답게 자라야 할 인격체로 존중받지 못한다. 아이러닉하게도 이러한 동우를 바라봐주는 유일한 존재는,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고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인 귀신이다. 그러므로 처음에 베개 귀신은 동우의 엄마가 일을 하고 들어오는 낮이면 사라졌다. 그러나 엄마와 함께 있어도, 엄마는 동우를 바라보지 않는다. 동우는 베개 귀신이 낮에도 있어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그 바람은 엄마의 상실이라는 잔인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처절한 고통과 외면 속에서 작가와 동우가 함께 불러낸 베개 귀신은 동우와 나란히 누워 동우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고, 행복을 빌어준다. 동우와 귀신은 서로의 아픔을 바라보며 만진다. 베개 귀신은 일그러진 눈으로 동우를 향해 웃어주고, 훼손된 손을 뻗어 일상이 손상된 동우를 일으켜준다. 동우는 귀신의 뻥 뚫린 눈을 만져준다. 소설에서 ‘귀신’이라는 호러적 장치는 그렇게 소외된 약자의 고통에 비로소 형체를 부여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능한다.

 

2) 동우를 보는 작가

 

소설은 전지적 작가시점과 1인칭 주인공 시점의 묘한 경계를 탄다. 형식상으로는 분명 전지적 작가시점이나, 글은 아이의 시선과 이해를 불쑥 넘어서지 않는다. 이렇게 형성된 독특한 분위기를 바탕으로 작가는 여섯 살 동우가 바라보는 삶의 고통스러운 풍경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가감 없이 그려낸다. 그래서 이야기를 읽어나가며 독자는 작가가 곧 동우의 입을 빌려 말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작가는 동우를 하나의 소재로서 작품을 위해 이용하지 않는다. 대신 동우의 모든 것을 세심하게 들여다본다. 그러니 과장되거나 자극적인 묘사가 없다. 작품은 모르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아는 만큼, 보여줘야 하는 만큼을 동우의 입장에서 조심스럽게 그러나 정직하고 생생하게 풀어낸다. 작가가 동우의 고통이 어떠한 것인지 명확히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우는 이로써 아픔을 바라보는 사람이 생겼다. 간결하고 절제된 어투의 문장들은 일반적이지 않은 수준이라고 할 수 있는 동우의 비극을 무신경하게 과장하는 대신 다소 먼 거리에서 묘사하게 돕는다. 이럴 때 피하기 어려운 냉소적 시선은, 아동인 주인공의 나이에 걸맞는 어휘와 심리묘사를 통해 거두어지며 이 비정한 서사는 정당성을 획득한다.

 

3) 이야기를 읽어내는 독자 – 호러의 윤리학

 

작가와 동우, 그리고 베개 귀신이 함께 만들어낸 이 이야기를 독자는 어떻게 읽을까. 어떠한 콘텐츠를 즐기는 태도는 수용자가 스스로 결정한다고 본다. 인사사고를 다룬 시사프로그램을 누군가는 피해자의 입장에 공감하고 분노하며 보고, 누군가는 모자이크 너머 시신을 스너프필름처럼 소비하고, 누군가는 범죄 기술을 배우기 위해 시청할 것이다. 공포라는 장르는 사회의 윤리규범을 벗어난 이야기를 죄책감 없이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 있다. 그러나 사람이 만들어내 사람이 배급하고 사람이 즐기는, 사람을 그린 콘텐츠라면 법과 윤리로부터 자유롭더라도 놓지 말아야 할 최소한의 윤리가 있을 것이다. 예술이 주는 감각적 즐거움을 숭상하는 탐미적 관점으로 접근할 때 이러한 논리는 초라할 수 있다. 하지만 감각적 자극을 위해 모든 것을 무시하는 태도는 한계 없이 달려나간다. 영화의 성폭행 장면을 포르노처럼 소비하는 것은 그 극단조차 아닐 수 있다. 창작자와 수용자가 가해자의 쾌락과 피해자의 적나라한 환부만이 아닌 다른 것을 바라볼 때 사람이 사람의 이야기를 사람답게 누리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여섯 살 동우와 베개 귀신이라는 등장인물을 존중하는 이 작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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