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전에 “적게 일하고 많이 버세요”라는 소설 속 대사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죠. 노동의 가치가 왜곡되기 일쑤인 고도 자본주의 세상에서 조금만 일하고 많은 보상을 얻는 건 아마도 대다수의 꿈일 겁니다.
<신입사원>의 주인공 세일은 그런 꿈의 직장을 만납니다. 하는 일이라곤 가만히 앉아서 시계를 바라보다가 비상시에 문손잡이를 당기는 것뿐. 하지만 보상은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는 수준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에겐 평생의 꿈인 아파트도, 외제 차도 티셔츠 사듯 손쉽게 얻을 정도네요. 말만 들어도 애사심이 들끓으며 회사에 뼈를 묻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보상이 어마어마하다면, 일 또한 어마어마하기 마련. 게다가 이유 없는 보상은 함정일 때가 많습니다(픽션 속이라면 더더욱). 과연 세일이 해내야 할 일, 치러야 할 대가는 무엇인가. 그것은 <신입사원>의 핵심 내용이기도 합니다.
2.
<신입사원>은 중심 사건의 내막과 전말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지는 종류의 소설은 아닙니다. 핵심은 곳곳이 가려져 있고, 그 주변과 핵심으로 이르는 길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불가사의하고 불분명한 내막과, 그 내막이 만들어 내는 의문과 긴장감이 좀처럼 책에서 눈을 떼기 어렵게 만드는 소설입니다.
핵심이 가려져 있다는 건 그 핵심에 다양한 해석이나 상상을 대입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필연적으로 독자에게 적극적인 해석을 요구하게 됩니다. 이런 방식은 취향에 따라 조금은 번거롭게, 혹은 무책임하게 느끼는 독자도 있겠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좋아하는 구성입니다. 그런 구성의 소설들은 읽고 나서도 곱씹을 거리도 많고, 다시 읽을 때도 새로운 재미와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신입사원>을 읽으며 든 의문들을 중심으로, 어떻게 읽고 느꼈는지 적어보려 합니다.
3.
[거인-꿈꾸는 자는 누구인가?]
거인. 혹은 꿈꾸는 자. 세일의 꿈속에서 세일에게 말을 거는 존재. 작품에서는 ‘개미들이 거인의 몸에 왕국을 세웠다’ ‘원숭이가 거인으로부터 불을 찬탈하여 문명을 일으켰다’는 암시적이고 상징적인 이야기가 반복해 등장합니다. 그리고 ‘거인이 몸을 일으키는 순간-꿈꾸는 자가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에 문명은 끝장날 거라는 경고도 이어집니다.
이 존재를 읽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역시 러브크래프트입니다. 크툴루. 바다 밑 도시에 잠들어 있다는 옛 지구의 지배자. 예민한 종복들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다시 지상으로 나올 날을 기다린다는 초자연적이고 막강한 힘을 지닌 존재. 거인-꿈꾸는 자는 여러 면에서 크툴루를 연상시킵니다.
하지만 두 존재는 여러 측면에서 다릅니다. 거인-꿈꾸는 자는 암시적인 정보로서만 존재할 뿐 크툴루와 같은 구체성(이 또한 상대적일 뿐이지만)은 거의 보여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인-꿈꾸는 자는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에 사는지, 어떤 차원의 존재인지조차 불분명합니다. 그러한 비구체성은 막연한 불안과 공포를 부채질함과 동시에, 상징적인 해석 쪽으로 손짓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자연’에 대한 은유일지도 모릅니다. 철학사 한 토막을 끌어들이자면, 퓌지스(Physis)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차츰 자연이 인간에게서 분리되어 정복과 이용의 대상이 되면서 근대 문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성적 사고가 중심이 되면서 거기에 포착되지 않는 것들은 미신과 꿈, 무의식의 영역으로 밀려났습니다. 그렇게 문명은 눈부시게 발달했지만, 자연은 날이 갈수록 파괴되었고 인간의 정신은 반쪽짜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번영을 위해 파괴되고 밀려난 것들이 되돌아와 끝내 문명을 무너뜨리고 말지도 모른다는 불안. 거인-꿈꾸는 자의 실체는 어쩌면 그런 불안감일 지도 모릅니다.
[회사는 무슨 일을 하는가?]
세일과 세 노인이 회사의 사무실에서 하는 일은 간단합니다. 시계를 지켜보는 일입니다. 시침은 9시를 가리키고 있고, 그것이 3시를 가리키게 되면 지하실로 향하는 문의 손잡이를 당기면 됩니다.
손잡이를 당기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소설에서는 그 실체를 속 시원히 밝혀주지 않지만, 단서가 될 만한 사건은 있습니다. 오래전 한 조에 두 명씩 근무하던 시절에, 시침이 3시로 넘어간 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관리자이자, 언제나 엄격하고 정확한 태도로 근무에 임하는 박 노인조차 그 사태 앞에서 선뜻 손잡이를 당기지 못합니다. 손잡이를 당기는 순간,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지고 말리라는 암시를 풍깁니다,
보다 못한 근무자 한 사람이 손잡이를 당기려 했다가 불에 타 죽고 맙니다. 이른바 마법의 불, 찬탈자의 불입니다. 수리를 위해 지하실로 내려갔던 김 씨는 온몸에 화상을 입고 얼굴이 녹아내린 채로 돌아옵니다. 봐서는 안 될 것을 보고, 들어서는 안 될 것을 들었다는 말과 함께요.
지하실에는 불가해하면서도 아주 강력한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거인-꿈꾸는 자거나, 혹은 관련된 무언가가 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3시가 된다는 건 꿈꾸는 자가 깨어날 시각에 가까워졌다는 뜻일 것입니다. 거인-꿈꾸는 자가 깨어나면 문명은 끝장나고 맙니다. 세 노인과 세일은 아마도 그 사태를 막기 위해 그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듯합니다.
과연, 그들은 하는 조치는 무엇일까요?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 문명의 종말을 막는 걸까요?
[박 노인의 정체는 무엇인가?]
회사의 사람 중 단연 돋보이는 이는 박 노인입니다. 그는 다른 노인들과 똑같이 근무하지만, 리더 격의 인물이며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게 분명해 보입니다. 국가의 수뇌부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그들을 점잖게 꾸짖으며 은근한 협박까지 하기도 합니다. 그의 정체는 수수께끼로 둘러싸여 있지만, 그만큼 불분명한 ‘핵심’의 정체를 잘 아는 듯 보입니다.
몇 가지 단서들로 추측해 보면, 박 노인은 상징 이야기에 등장하는 ‘불의 찬탈자’로 보입니다. 거인으로부터 불을 훔쳐내어 원숭이들의 문명을 이룩한 이죠. 그는 자신과 회사가 ‘문명의 반석’이며, ‘세상 모두가 빚을 졌다’고 강조하며,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길을 보여준다’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작품의 후반부에서는 종교와 신에 관한 관념을 두고 ‘모두가 그의 창작’이라는 설명이 나옵니다. 이를 바탕으로 생각해 보면, 박 노인-불의 찬탈자는 문명의 근간과 그것을 이루는 핵심적인 요소와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이 부분을 읽다가 저는 유발 하라리가 쓴 <사피엔스>가 생각났네요. 화폐, 신 등 상상의 질서를 동시에 믿을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 문명의 발전을 이끌었다는 주장이 담겨 있었죠. 박 노인의 정체는 그런 개념적인 의미에서 파악이 가능할 듯싶습니다.
하지만 단정은 어렵습니다. 김 씨가 폭로한 박 노인의 정체는, 그런 긍정적인 존재가 아닌, 인류 역사와 내내 함께했던 학살자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랜 세월에 걸쳐 다양한 모습으로 인류 역사에 개입하여 무수한 학살을 이끌고 유도해 왔습니다. 어째서일까요? 학살과 문명을 유지하는 일은 어떤 연관이 있는 걸까요?
[손잡이를 당기는 것 & 비탄의 자장가의 의미]
소설 중반부부터는 ‘비탄의 자장가만이 꿈꾸는 자를 잠들게 할 수 있다’는 전언이 자주 등장합니다. 비탄의 자장가. 혹은 문명을 유지 시키기 위한 희생. 혹은 학살. 박 노인은 비탄의 자장가를 부르는 일을 획책해 온 인물 혹은 관념으로 보입니다.
희생을 통해 유지되는 질서. 자연스레 떠오르는 건 어슐러 르귄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입니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인용되기도 했죠. 이 단편에서는 오멜라스라는 가상의 공간을 통해 ‘희생양’이란 개념을 보여주었습니다.
많든 적든, 문명은 누군가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전쟁과 정복을 통한 부의 축적이 문명의 발전을 이끌었습니다. 때로 약자를 착취하고 노예로 삼으면서 발전했고, 숲을 불태우고 강을 오염시키면서 발전했습니다. 그러다가 원자탄으로 도시를 멸망시키면서 큰 전쟁을 종결시키는 아이러니한 희생까지 보여주었습니다.
회사에 입사하기 위해 병원에서 진단받던 순간부터 세일은 이런 질문들을 반복해서 받습니다. ‘100명을 구하기 위해 10명을 죽여야 한다면?’‘ 희생을 통해 문명을 유지할 수 있다면?’박 노인이 획책해 왔던 일은 그런 것일 겁니다. 문명을 유지 시킬 희생이 선택되도록 이끌어왔던 것이죠. 최대한 그 추한 면모가 드러나지 않도록 가리고 숨겨가면서 말입니다. 비명과 비탄의 자장가가 다시 꿈꾸는 자를 재울 수 있도록 하려고 말입니다. 그동안 문명 바깥으로 밀려났던 것들이 문명을 전복시키는 일이 없도록, 파수꾼 노릇을 해왔던 것일 테지요.
[왜 세일인가?]
한편으로 의문도 듭니다. 어째서 세일일까요? 아무나 함부로 발조차 들일 수 없는 사무실. 꿈꾸는 자의 종복으로서, 문명의 존폐를 가를지 모를 선택을 내려야 하는 중대한 역할을 어째서 세일 같이 평범한 인물이 맡게 되었을까요. 학벌, 배경, 능력, 모두 부족한 그가 어째서 ‘영감님들이 좋아할 만한’ 사람이었던 걸까요.
이 역시 또렷한 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소설에 제시된 몇 가지 단서로 추리 혹은 추측해 볼 수 있을 뿐이죠. 가장 먼저 떠오르는 해석은, 세일이 문명에 위협이 되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 그 사회를 바탕으로 이룩한 문명. 그렇다면 문명을 지탱하는 기둥은 가정과 사유재산일 것입니다. 현재 세일은 그 두 가지를 가질 가능성이 희박한 사람입니다. 번듯한 직장을 가질 수도 없고, 한심한 연애 스킬로 미루어 볼 때 여자를 만나 결혼하기도 지난해 보입니다. 회사에 입사함으로써 세일은 그 두 가지를 얻을 가능성이 생깁니다. 찬탈자의 불. 그것은 문명을 움직이는 동력이며, 원시인들이 추위를 피해 쬐는 불이기도 합니다. 또한 세일이 선영을 생각할 때 느끼는 온기이기도 합니다.
많이 가진 이일수록 문명을 지키는 선택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내 가족이 아닌 남의 희생을 결국 당연시하게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해 보입니다. 단순히 ‘가지지 못한 자’라는 기준으로 세일을 골랐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그를 설명하는 또 다른 면모는 그가 ‘소외된 자’라는 것입니다. 어릴 적 가족들과 고급 식당에 갔다가 눈치가 보여 제 발로 나온 경험에서 보듯, 그는 사회 계층에서 아래쪽에 있던 인물입니다. 당연히 그의 어머니도 그렇습니다. 선영은 부모가 새벽기도를 갔다가 사고로 비명횡사했던 기억을 고백하는데, 그 고백과 하나의 상념이 교차합니다. ‘짧게나마 비탄에 찬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꿈꾸는 자의 귀에 안식의 노래를 불러주었을 것이다. 그게 원숭이들의 삶의 이유다.’그녀 또한 꿈꾸는 자를 재우기 위한 희생의 일부분이었던 것입니다.
세일과, 그가 소설 속에서 관계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소외된 자들입니다. 희생양을 고르는 일은, 결국 같은 희생양이 떠맡게 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양의 주인이 하는 일이란, 희생양이 될 후보들을 한자리에 몰아 넣는 것뿐일지도 모르죠.
세일이 희생을 선택해야 하는 인물은 어머니와 선영이었습니다. 그 두 사람을 희생한다면 문명을 구할 수 있고, 세일은 문명의 파수꾼으로서 큰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세일은 누군가의 비탄으로 이루어지는 꿈을 거부합니다. 끝내 손잡이를 당기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꿈꾸는 자는 깨어납니다.
4.
<신입사원>은 알 수 없는 존재가 주는 공포와 미스터리를 잘 살린 코스믹 호러이자, 문명 비판적인 상징과 주제를 적절히 배합한 작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끝내 몇몇 부분은 밝혀지지 않고,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다는 점도 작품의 불가사의한 매력을 한층 배가시킵니다.
개인적인 아쉬운 점이라면, 결말에 이르러 세일의 선택을 뒷받침할 수 있는 서사가 더 붙었다면 주제가 좀 더 풍성해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어머니와 선영의 이야기가 좀 더 제시되었다면 세일의 선택도 좀 더 힘을 받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물론 소설의 성격이 다소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만.
누군가의 비탄과 비명이 문명을 전복시킬 존재를 재운다는 은유가, 머릿속에 오래도록 남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가, 어디서 그런 비탄과 비명을 내지르고 있을까요. 문명은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유지되는 것일까요. 천천히 곱씹어 볼 만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