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고 있는 세계에, 얇고 투명한 레이어가 하나 덧씌워져 그 위에 홀로 던져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누구와도 합쳐지지 못하고, 그렇다고 이렇다 할 적응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지독하도록 쓸쓸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나만 빼고 모든 것이 매끈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소외를 감지할 때도 있다. 집에 들어가려는데 열쇠가 뻑뻑하게 안 맞거나, 아파트 10층의 주민이 9층에 잘못 내린 것처럼.
마치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처럼.
여기 지독한 두 평행세계가 있다.
하나는 감각이며, 하나는 추상이다. 하나는 꿈이며, 하나는 현실이다. 하나는 몰려오는 괴물이며, 하나는 달려드는 인간이다. 이토록 다른 두 세계를 ‘평행’이라 정의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가 다른 하나의, 몹시도 고통스러운 복사본이기 때문이다.
악몽에서 깨어난 이후의 상황이 차라리 도로 잠드는 게 낫겠다 싶은 생각이 들 정도라면, 이것도 저것도 하지 못할 정도로 최악인 것들의 사이에 끼어 있다면, 설상가상과 진퇴양난이 엎치고 덮치면. 우리는 차라리 한 평짜리 승강기에 갇히는 것을 택하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승강기는 언젠가 멈추고 녹음된 목소리는 우리가 내리기를 재촉한다.
“딩동댕. 문이 열립니다.”
이 소리는 꿈과 현실의 경계에 존재하는 알림이다. 짝수층 엘리베이터가 홀수층에 섰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기계적으로 열리는 문 너머에는 둘 중 하나의 공간이 보인다. 10층이거나, 9층이거나.
10층과 9층은 계단으로 오가자면 서른 걸음도 걷지 않고 도착할 수 있는 정도의 거리다. 하지만, 짝수 층에만 서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홀수 층에 내려졌다면 이야기는 많이 달라진다. 9층은 내가 원해서 도착한 곳이 아니다. 자의에 의해서 도달한 곳도 아니다. 타인, 아니 기계에 의해 내려진 공간이다. 그곳에는 때로 변하는 괴물도 있으며, 진창이 펼쳐지기도 하고, 개들이 달려와 나를 물어뜯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나는 9층에 처음 내려보는 걸까.
주인공은 10층에 살고 있다. 그곳의 사람들과 가상의 9층에 존재하는 괴물들은 몹시도 닮아있다. 아가리를 벌리고 무엇이든 소화 시킬 것만 같은 흉측한 생물은 거실에서 배를 긁고 있는 형부와 닮았고, 흰 털을 날리며 그녀를 물어뜯는 노견은 시어머니를 닮았다. 주인공에게 끔찍한 공포감을 주는 모든 것이 현실을 빼다 박은 것처럼 기능한다.
그러니 이렇게 생각해보자. 어떤 창조적인 능력을 지닌 사람이 (아마도 작가가) 10층 아래에 하나의 평행세계를 만들어 버린 것이라고. 그냥 10층이 아닌 9층일 뿐인데 이렇게 고통스러울 일인가 싶지만, 현실에도 괴물 같은 사람은 있으니까. 가만히 곱씹자면 주인공 역시 10층의 주민이라는 명분은 있어도 딱히 그곳에 들어맞는 삶을 살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9층에 사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손에 들고 있는 열쇠는 10층의 것인데 어째서 9층에 내려진 것이냐고 묻는다면, ‘그럼 너는 온전히 10층의 사람이었느냐’라고 9층의 창조주가 답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9층과 엘리베이터는 어디에도 들어맞지 못했던 누군가의 삶에 대한 은유다. 어쩌다 떨어진 이곳에서, 태어난 김에 살고 있는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다. 짝수층 엘리베이터가 9층에 설 때마다 몰려오는 기묘한 공포는, 우리가 처음 느끼는 기분이 아닐 수도 있다.
극복하지 못한 것들의 묶음
잘 정돈된 세계에 존재하는 미묘한 어긋남은 오히려 큰 균열처럼 보인다. 오메르타 작가의 <딩동댕, 문이 열립니다>는 이를 아주 잘 활용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어긋남은 총 세 가지 종류로 존재한다. 하나는 9층이 10층보다 한 층 아래에 있다는 점이다. 한 층 위보다 아래에 있는 이유는 꿈이 현실보다 나은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두 번째 어긋남은 9층 자체에서 발생한다. ‘맞춰지지 않는 열쇠’는 9층에도 주인공이 온전히 편입되지 못함을 드러낸다. 세 번째 어긋남은 10층에 있는 언니의 집에서 느끼는 미묘한 공기에서 기인한다.
10층은 소설의 공간을 환상과 현실로 나눌 때 ‘현실’에 해당한다. 10층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것은 실제의 삶에도 적응하지 못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거실에서 보란 듯이 배를 긁고 있는 형부와 조금만 짧은 옷을 입어도 ‘몸 파는 여자’처럼 보인다는 말을 들어야 하는 주인공을 보자면 세상이 주인공에게만 왜곡된 시선을 보내는 것 같다. 여성이 서울로 대학을 다닌다면 ‘평범하지 못한 지지배’가 되고, 서른다섯의 여성에게 마흔둘의 여드름투성이 남자는 분에 넘친다고 말하는 현실. 왜 서울로 대학을 다니는 누군가들은 특정한 경계에 의해 분류되는가. 왜 마흔둘의 남자에게 서른다섯의 여성이 분에 넘치지는 않는가. 아니, 그 모든 걸 떠나서 사람이 어떻게 ‘분에 넘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뉠 수 있는가. 소설 속에서는 아무도 의문을 표하지 않는다. 답 없는 세상과 9층의 환상은 슬프게 닮았다.
이런 일들의 반복을 누가 헤쳐 나갈 수 있을까. 누가 이 끊임없는 지옥을 극복할 수 있을까. 소설 속의 현실은 극복하지 못한 것들의 묶음이며 꿈은 극복하지 못할 것들의 모임이다. 이 사이를 헤치고 나아가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면 어떨까. ‘어긋남’은 어쩌면 당연하다. 이렇듯 이미 균열이 생긴 공간에 제대로 된 조각이 끼워 맞춰지기는 어렵다. 오히려 잘못된 조각들만 즐비한 이곳에서 제대로 된 조각은 살아남기 위해 애써야 한다. ‘임무’인 것처럼 임신 테스트기를 들이미는 시어머니, “뱃속의 태아를 포함해 모든 사람이” 나를 반기지 않는 세상을 보며 누가 어긋나지 않을 수 있을까. 오히려,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칠 것이다.
9층의 환영(幻影)은 그러므로 예정된 것이다. 끝없는 수렁과 물어뜯기 위해 달려드는 개들, 아가리를 벌리고 소화액을 내뿜는 괴물은 그보다 끔찍하면 끔찍했지, 더 나아지지는 않은 현실을 반영한다.
우리는 저마다의 방법으로
이 지옥을 사는 주인공에게 ‘앞집 여자’가 어느 날 말을 건다.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하고 계단을 올라야만 했던 그녀에게 결혼도 하지 않은 “어린 아가씨”가 하는 말은 가벼워 보이기도 했겠지만, 한편으로 주인공은 그 말에 눈물을 흘렸다.
남편은 앞집 여자가 술집에 나가는 것 같다며 어디서 들었는지 모를 “텐프로니 스폰이니 하는” ‘업소 용어’를 들며 지껄인다. 고삐가 풀린 사람처럼 남편은 앞집 여자에 대한 “음흉한 욕망”을 드러낸다. 주인공은 꿈을 꾼다. 이전처럼 끔찍한 것들이 등장해 주인공에게 달려오지만, 그전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 바로 “황금빛 나비”의 등장이다. 그날 이후, 그녀의 시아버지가 돌아가신다. 시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아들을 낳지 못하고 자궁을 들어낸 주인공의 “아랫도리를 발가벗겨 후벼 파는” 시어머니의 구렁텅이에 등장한 사람은 뜻밖의 앞집 여자였다.
자유분방한 탈색 머리의 앞집 여자는 주인공의 꿈에 나왔던 나비와 닮았다. 앞집 여자는 소설 전체를 통틀어 주인공에게 손을 내밀어준 유일한 인물이다. 평생 피워보지 않은 담배를 처음 입에 물게 해준 사람이다. 역설적으로, 장례식장에서 주인공은 자유로워 보인다. 그리고 비로소 그녀는 자신이 보는 환상, 9층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꿈에 대해 앞집 여자에게 처음으로 입을 연다.
그리고 그녀에게 앞집 여자가 하는 말은 뜻밖이다.
“계단을 선택한 거잖아요. 무서운 대상을 피해서.”
위로와는 거리가 먼 것 같은 말이지만, 조금만 더 읽어보자.
“언니. 비난하는 건 아니에요. 저마다의 방식으로 상대하는 거죠.”
‘피한다’라는 말이 ‘비난’의 의미로 쓰인 역사가 오래되었기에 우리는 일단 무엇을 피한다는 걸 부정적으로 받아들인다. 회피와 마주함은 각각 ‘도피’와 ‘용기’로 여겨졌기에 일단 그렇게 이해하기로 약속한 것이 당연하게 굳어져 버렸다. 피하는 것만이 선택지가 되는 상황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고통을 감내하는 것만이 당연하게 여겨진 걸까.
주인공의 시어머니는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을 오르다 굴러 사망한다. 장례식장에 찾아온 앞집 여자는 마지막 남은 ‘쥐’에게 슬리퍼를 던지는 건 ‘언니’의 몫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시 꾸게 된 악몽에서 주인공은 새끼 고양이를 안고 괴물을 무찌르는 데에 성공한다. 괴물을 무찌른 꿈을 꾼 이후, 남편은 한강 물에 휩쓸려 실종된다. 작품에 명시되지 않았지만, 아마 그녀의 악몽 역시 끝났으리라.
앞집 여자는 주인공을 지옥에서 놓아준다. 물고 늘어지며 반복되던 나날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은정이의 인생”이 자신보다는 조금 더 행복하고 평범하기를 바라는 주인공의 마지막 소망 역시 무엇에 대한 암시겠지만, 그것이 어떤 것일지는 각자의 생각에 맡기자. 나는 일단 은정이가 행복해질 것이라는 데에 한 표.
우리는 저마다의 방법으로 지옥을 우회하고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계단으로 다닌다고 해서 비겁자가 되는 것은 아니며, 그것이 인생으로부터의 도피라고 말할 것은 더더욱 아니다. 지옥을 마주하지 않기 위한 하나의 방법을 치열하게 찾아낸 것일 뿐이다.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한 사람의 몸부림을 ‘도망’으로 여기는 시대는 이제 지나도 한참 지나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겠는가.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이 명언의 반열에 오르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고통을 마주하는 것을 종용하는 일은 사회구성원들을 소모 시키는 악습이다.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단언컨대 없다. 피하는 사람을 ‘도망치는’ 사람으로 여기는 세상에서 우리는 매일, 치열하게 계단을 오르고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펼쳐지는 악몽을 피하기 위해서.
바라건데 아무도 세상과 나란한 지옥을 억지로 마주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것은 애초에 극복할 수 없는 환상이기 때문이다. 조금만 기다려 보자. 황금색 나비가 저 멀리에서 날개를 펄럭이며 다가온다면, 그것이 지옥의 문을 닫을 수 있는 신호일지 모르니. 그때 날릴 수 있는 찰진 슬리퍼 하나만 준비해 둔다면, 우리는 계단을 오르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딩동댕, 하는 경쾌한 소리에 맞서는 우리의 최선일 테다.
아참, 그리고 또 짝수층 엘리베이터가 홀수층에 내린다면 주위를 둘러보자. 분명히 그곳에 불시착한, 나와 같은 누군가의 손을 잡게 될 수도 있으니.
딩, 동, 댕. 오늘도 지옥의 문이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