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주의※
본 작품의 감상 포인트를 언급하는데 있어서 후반부와 결말을 언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작품을 오롯이 즐기고 싶으시다면 먼저 읽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읽으면서 정말 감정적으로 울컥하는 슬픔을 느낀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습니다.
2013년 7월 모의고사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지문을 읽다가 울 뻔한 적 이후로 처음인 것 같습니다.
이 소설에 대해 얘기하고 싶은 포인트는 두 가지입니다.
‘호러와 슬픔의 관계’와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한 빌드업의 중요성’입니다.
우선, 호러는 일단 ‘무서운 것’입니다.
하지만 ‘무섭다’라는 감정은 따지고 보면 그 종류가 다양합니다. 무서운 것도 다 똑같이 무서운 게 아니라는 것이죠. 그 중에서 이 소설은 ‘상실의 공포’, ‘갑작스럽게 닥치는 사고’, ‘호사다마(好事多魔)에 대한 불안’을 다루고 있습니다. 삶은 계획한대로 되지 않고, 언제나 예고 없이 불운이 닥칠 수 있으며, 좋은 일은 갑자기 나쁜 일로 치달을 수 있는… 그래서 가장 소중한 시간이나 사람을 한순간에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모든 사람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부조리한 현실의 상실’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꼬집고 있죠. 그리고 이러한 ‘상실’을 다루는 공포는 많은 경우 ‘슬픔’을 동반합니다. 당연한 이야기죠, 누군가/무언가를 잃는다는 건 슬픈 일이니까요. 그 중에서도 ‘누군가’를 잃는다는 건 말도 못 하게 고통스럽고 슬픈 일이죠. 이 무시무시하게 슬픈 일이 갑자기 나에게도 아무렇지 않게 닥칠지도 모른다는 공포, 이 소설은 그걸 잔인하게 드러냅니다. 그래서 이 소설은 무서운 것과 동시에 슬픕니다.
하지만 이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 슬픔을 극대화시켜야 합니다. 독자가 인물에 감정이입을 하고, 내용 전개에 몰입을 할 수 있어야, 그 인물과 한마음이 되어 똑같이 그 슬픔을 오롯이 느낄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인물의 서사를 쌓아올려야 하는 것이죠. 우리가 잘 모르는 사람이 슬퍼하는 걸 보고 갑자기 옆에서 똑같이 참담해할 수는 없는 거니까요. (많은 영화들의 실패한 신파들은 이러한 서사를 못 쌓아올렸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상황을 잘 아니까, 그래서 그 사람을 응원해주고 싶었고, 마음속으로 잘 되길 바랐으니까, 그러니까 그 사람의 좌절과 상실이 와닿고 공감이 되어서 참담해집니다.
여기서,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한 빌드업의 중요성’이 드러납니다.
이 소설은 정말 착실하게 벽돌을 쌓아올립니다. 근데 그 벽돌이 수수하고 투박합니다. 그니까 선문답 같이 추상적인 비유를 쓰지 않고 말하자면, 여기서 나오는 부모자식의 관계는 나중에 올 비극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과장되게 ‘행복하고 이상적이고 멋진 것’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나중에 올 비극을 그려내기 위해, 강렬한 대비를 위해, 초반에 ‘공익광고에나 나올 것처럼 행복하고 아름다워서 영원히 지속되길 바라는 예쁜 상황’을 그려내는 경우가 많은데, 이 소설에서는 과감하게 그런 걸 TV 속 공익광고 속으로 집어넣어 버리고, 현실은 다르게 설정합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와닿았습니다.
TV에 나온 것처럼, 예쁘고 이상적인 상황은 아니지만, 그리고 서로 통화하는 내용이 조금 모나고 툭툭 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생각하고 아끼고 사랑한다는 게 잘 느껴지는, 다른 나라 이야기 같지 않은 너무나 인간적인 관계에 빠져들게 됩니다. 여기서 환상괴담 작가님의 대화 묘사에 연신 감탄을 하게 되더라고요. 대화라는 게 막상 쓰려고 하면, 너무 뻣뻣하거나 작위적이지 않은지, 저에게는 참 어려운 작업인데, 마치 통화를 엿듣는 것 같은 생생한 느낌이 드는 게 좋았습니다. 그 덕에 인물들이 살아움직이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작품의 인물들을 가상의 인물이 아니라, 하나의 사람으로서 감정이입하고 몰입할 토양이 갖춰진 것이죠.
그 덕에 시간을 내서, 피곤한데도 피곤하지 않다고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며, 집으로 찾아가겠다는 자식과, 그 말에 미안하면서도 들떠서 뭐라도 해먹여야겠다는 부모의 마음이, 구구절절 설명되는 것 없이 그대로 느껴집니다. 그래서 저절로 해피엔딩을 바라게 됩니다. 크게 바라는 것도 없이, 그저 저녁밥 한 번 얼굴 마주보고 먹고 싶다는 그 소박한 소망 하나 이뤄지면 좋지 않습니까? 거창하지 않아도, 그런 행복 하나 누리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 그게 삶의 원동력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읽게 됩니다.
그런데 이게 산산히 부서집니다. 예상이 되었기에 더 무섭더라고요. 미지(未知)의 공포가 아니라 예지(豫知)의 공포라고 할까요… ‘설마, 설마, 안돼…’하는 마음이 들게 하고, 결국은 우려했던 대로 일이 일어납니다. 정말 참담하더군요. 억지로 집에 오라고 한 자기 잘못이라고 자신을 탓하는 부모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은 더욱 참담해집니다.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었던 건, 상술했듯이 빌드업이 훌륭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소중한 사람이 자신의 부탁으로 오다가 사고로 사망했다’라는 내용이 다짜고짜 나왔더라면, 이 정도로 감정을 이입해서 슬픈 감정을 느끼진 않았을 겁니다. 오히려 그런 사건은 창작물에서 많이 사용되었던 일종의 준(準)클리셰이죠. 하지만, 같은 주제를 쓰더라도, 어떻게 구축하느냐에 따라 그냥 그런 묘사로 끝나기도 하고, 이 소설처럼 묵직한 감정의 한 방을 먹이기도 합니다. 역시 주제가 중요한 게 아니라, 구성과 묘사가 중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를 잘 드러내는 대목이, 마지막에 쉰내가 나도록 방치된 저녁밥이 한낱 쓰레기처럼 취급되어 처리되는 부분입니다. 그들에게 버려진 저녁밥상은 ‘행방불명된 잘 모르는 노인네가 남기고 간 잔여물’에 불과합니다. 잘 모르는 사람인데다가 사정도 모르니, 감정이입이 될리가 만무하죠. 하지만, 전후사정을 다 알고 있는 독자는 그걸 보면서 가슴이 쓰라립니다. 어떤 마음으로 준비한 것인지 알기에, 그렇게 함부로 대해지는 것에 반감마저 들 정도입니다.
정성스럽게 쌓아올린 서사가 나중에 감정적인 공감으로 이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소설이었습니다.
앞으로의 활동도 기대하겠습니다. 건필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