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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작품: 어둠 속에서 나를 일으켜 세우지 말지니 (작가: 장아미, 작품정보)
리뷰어: 오메르타, 20년 9월, 조회 158

아주 오래 전에 느껴왔던
나를 보는 눈동자
그 어느 곳에 있어 봐도
피할 수 없어

– 엄정화 <눈동자> 중에서

 

 

어릴적 시골집 흙마당 한 켠에 여분의 벽돌과 나무 합판으로 얼기설기 만들어 준 오두막 비스무리한 조그만 공간을 보금자리 삼아 지내던 누렁이 한 마리가 있었어요. 새벽녘 목청을 높이는 수탉들에 맞지도 않는 화음을 넣고, 한낮 불 같은 태양 아래 납작 업드려 혀를 내빼고 항복 선언을 하다가, 노을이 지면 길어진 제 그림자에 화들짝 놀라곤 하던 녀석이었어요. 귀엽게 생긴 것을 빼면 도통 부릴 줄 아는 재주라곤 없던 시골개였죠. 그런 누렁이를 엄마는 ‘이쁜이’라고 불렀고, 집을 비워두고 나설 때면 꼭 불가능한 임무를 맡겼어요. 이쁜아, 집 잘 봐라. 남녀불문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꼬리만으론 성에 안 차 엉덩이까지 흔들어대며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똥개가 무슨 수로 집을 지키나요.

 

장아미 작가님의 <어둠 속에서 나를 일으켜 세우지 말지니>를 읽고, 보는 것과 지키는 것의 연결고리를 생각하다 보니 난데없이 멍뭉이 얘기로 리뷰를 시작하고 말았네요. ‘본다’ 라는 단어에는 눈으로 대상을 인식한다 라는 뜻 외에도 다양한 의미가 있지만 특히 ‘지킨다’ 라는 뜻이 꽤나 자주 쓰여요. 애를 본다, 집을 본다, 하면서요. 그런데 이게 꼭 우리말 만의 얘기는 아닌가 봐요. 제가 언어학자가 아니라서 다양한 예시를 들지는 못하지만 왓치멘 (Watchmen) 이라는 자경단 그래픽 노블도 있고, 독일어로도 수호자를 뵈히터 (Wächter) 라고 한대요. 무언가 소중한 것을 지키려면 이를 위협하는 위험 요소 또는 존재들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우선 필요해서 그렇겠죠.

 

 

 

나자르 본주 (Nazar Boncugu) 는 눈동자가 그려진 푸른 유리구슬인데, 터키를 대표하는 기념품으로 재앙을 물리치는 부적이라고 해요. 이름을 번역하면 ‘악마의 눈’, 그 자체가 섬뜩하니 불길하긴 하지만 오랜 믿음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예요. 예전에 산에서 마을로 내려와 농작물을 해치는 멧돼지들을 쫓기 위해 호랑이 똥을 이용한다는 얘기를 얼핏 들었던 기억이 나요. 나자르 본주, 이 눈동자의 주인도 이계에서는 산골의 호랑이 만큼이나 강력한 존재라서 어지간한 악령들은 그 푸른 눈동자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좁은 어둠의 틈으로 제 몸을 구겨 숨기기에 바쁜가 봐요. 서슬 퍼렇게 잡귀들을 노려보는 것 만으로 소중한 이를 지켜줄 수 있다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요!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목도한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없는 이에게는 ‘본다’는 것은 두려움이에요. 저만 해도 간혹 밤길에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조심스레 골목 모퉁이를 살피는 것은 거기에 아무것도 없다는 안도감을 얻기 위함이지, 이계의 존재를 두 눈으로 직접 보려는 의도는 눈곱 만큼도 없으니까요. 덜그럭거리는 소리의 주인공이 간식을 찾던 길고양이의 발에 차여 균형을 잃은 돌멩이라는 걸 확인하고 싶었을 뿐인데, 나무로 조각된 제 무릎 높이 키의 사내가 물구나무를 서서 두 손을 번갈아 디디며 저를 쫓아 온다면 우지끈 엉덩방아로 끝날 일이 아니죠. 괴이한 이계의 존재들과 장례 행렬을 보고서도 제 정신을 잃지 않고 어떻게든 빠져나온 것 만으로도 이설은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이 소설에서 ‘본다’는 행위는 또 하나의 방향으로 사용 되는데요. 바로 이계의 존재들이 자신들의 세계에 발을 들인 이설을 보는 것이에요. 겁을 먹은 채로 숨고 도망치는 이설을, 꼭두들이 보고, 황금빛의 눈 네개를 가진 방상시가 보고, 끝내 소방상이 열리고 내관에서 일어난 대왕이 보는 장면이 등장해요. 이설의 입장에서 보자면, 상대에게 무방비 상태로 보여지는 것이어서 위험하기도 해요. 하지만 이설과 대왕이 마주하는 장면에서는 내가 보는 상대가 나를 본다는 것은 관계가 연결됨을 의미해요. 판도라의 나비족도 ‘나는 당신을 봅니다’ 라는 말로 사랑 고백을 한다죠.

 

“이미 본 것을 내 어찌 잊을 수 있겠느냐.”

 

도입부에서 밤길을 달음질하던 이설이 운동화 끈이 풀려서 멈춘 김에 휴식을 취하고, 열을 식힐 식수대를 발견해서 목을 축이다가 샛길을 보게 되는 일련의 과정은 사실 우연을 가장한 운명의 실타래였어요. 그게 아니고서야 백지 조각을 끼운 새끼줄로 분명히 표시를 해두었음에도 그 선을 넘어갈 담력이 난데없이 어디서 솟아났겠어요. 자연스레, 마땅히 그래야 했던 것 처럼, 걸음을 옮긴 것 뿐이에요. 아주 오래 전부터 무수한 생과 사를 번갈아 가며 벗어나지 못하고 걸었던 길이니까요.

 

흔히들 반복되는 일상이 햄스터 쳇바퀴 같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런 느낌을 받는 게 언제인지 생각해 보셨나요? 무딘 사람과 예민한 사람에 차이가 있겠지마는 적어도 첫날, 많이 양보해서 둘째 날은 아닐 거예요. 말하자면 이설이 신의 길을 벗어날 수 없고 이계와 일상이 가까이 겹쳐져 있다는 것을 깨달은 시점은, 이미 상여의 주인인 대왕과 그의 유일한 정인인 이설이 무수히 여러 번 서로를 탐하고 희롱하는 숨 가쁜 유희를 행한 뒤의 일이라는 얘기지요.

 

결국 대왕은 ‘이번에도’ 이설을 정복하지 못하고 눈알만 하나 빼앗겨요. 하지만 그는 분개하기는커녕 즐거움에 겨워 하지요. 왜냐하면 그의 눈알이 이설의 손 안에서 붉은 구슬이 되었거든요. 터키에서 쉽게 사는 기념품 나자르 본주가 아닌, 세상에 하나 뿐인 눈알 부적이 되어 이설의 남은 생을 ‘보게’ 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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