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에서 드러나는 대지와 존재의 진리. 공모(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작가: 김완두, 작품정보)
리뷰어: 이채윤, 20년 5월, 조회 87

오늘 이 시간은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의 시각에서 이 작품을 리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교과서에 예시로 들어도 좋을만큼 모범적인 작품인데요. 이미 마술정원님께서 좋은 리뷰를 남겨 주셨기 때문에, 서로 내용이 빗나가지 않도록 그 중에 네개의 문장을 가져와서 운을 떼어 봅니다.

“<1> 빵이란 대중에게 대체될 수 없고 침해될 수 없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술정원- ”

이 작품을 읽으면 여러분 모두 ‘빵’이 뭔가를 상징하고 있다는걸 느끼실 겁니다. 굳이 표현해보라하면 모두 다르게 설명하겠지요. 하이데거는, 예술에서 드러나는 것이 ‘세계와 대지의 진리’라고 합니다. 쉽고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여기서 ‘세계’란, 우리가 존재하는 이 세계의 존재의 총집합이자, 천지인, 신, 진리, 도 등 약간은 뜬 구름 같은 느낌의 개념입니다. 우주? 은하계? 이런 것보다 큰 형이상학적인거죠.

‘대지’는 우리가 살아가는 자연, 사회문화적 터전, 이 지역과 땅, 생태계 등을 말합니다. 케케묵은 느낌이죠. 결국 자연을 사랑하자, 자연을 보호하자 이런건데요. 이게 만만하게 볼 것이 아닌 것이, 다들 나만의 인생 영화, 인생 작품 같은 것 떠올려 보면, ‘자연’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리’란, 존재의 진리, 그 대상이 그 자체로서 존재함을 깨달을 때, 경이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하이데거는 ‘그 진리는 뭐다’라고 한게 아니라, ‘그 진리를 깨달으면 충만한 기분이 든다’라는 식으로 했습니다. 이상하죠? 하이데거는 존재를 깨달으면, 사람은 그 대상에게 감정적인 무언가를, 경이감, 충만함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뭔 말이지 싶으시죠.

예를 들어, 내가 아끼는 손목시계가 있다고 칩시다. 졸업할 때 가족이 선물해준 시계가 있다고 쳐요. 뭐 그리 비싼건 아니더라도 내가 아끼는 물건 베스트10에 들어간다고 합시다. 이 시계는 지금 나에게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러면 이제 내 방 벽에 걸려있는 벽시계를 보죠. 한참 전부터 벽에 걸려있던 거지만, 저 시계는 내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시간’을 봐왔을 뿐이죠. 한번 지금 쳐다봐줍니다. 아 저 시계. … 그러고보니…그러네 저 시계…. 이러면서 어떤 감정이 치미는데, ‘정(情)’이나 ‘고마움’이랄까요. 그런 감정이 듭니다. 하이데거는 이런 것을 도구의 신뢰성이라고 하고, 이런 감정이 드는 순간을, 이 존재의 드러남, 존재의 진리라고 봅니다. ‘저 시계는 동그랗고 바늘이 돌아가’라고 분석하는게 존재가 아니라, 내가 느끼는 감정이 존재의 내면에 숨은 진리라고 봅니다. 일단 그런 감정을 느끼고 생각을 이어가보면 뭔가 ‘고맙다는’ 쪽으로 생각이 이어집니다. ‘오래 썼는데 아직 잘 돌아가네. 음 수고가 많다 내 벽시계 먼지라도 닦아볼까’ 뭐 이런 느낌 들죠. 난 차마 그런 센티멘탈이 없다…물건에서 감정을 느낀다니 말이 안된다…존재하면 그냥 존재하는거지, 무슨 감정이 존재를 드러내…싶으시다면, 하이데거가 예로 들었던 반 고흐의 ‘구두’를 검색해봅시다. 구두? 구두가 그냥 구두지 뭐. 싶지만 보시면 달라질 겁니다.

“<2> 빵 안에 들어간 재료에는 재료를 만든 각 사람의 고생과 슬픈 사연이 들어 있기 마련입니다. -마술정원-

우리는 빵을 그저 먹어치우죠. 빵 보면서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생각하지 않고 먹어버리기만 하면 우리에게 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상학적으로 존재하려면 우리가 인식하고 느껴야 합니다.

우리가 앞서 말한 것처럼 마음을 열고 빵의 존재를 보면, 빵은 그것을 만든 사람과, 여러가지 재료를 준 자연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모든 도구에서, 특히 예술에서 ‘대지’가 드러난다고 합니다. 대지는 단순히 인간에게 물질적 자원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자원도 제공합니다. 대지가 우리에게 준 여러가지 자원들은, 우리가 단지 먹고 마시게 해주는 것 뿐 아니라, 우리의 정신적 안정감과 우리의 친목활동에도 필요하죠.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록 많은 빵이 필요하고, 우리는 빵을 쓸데없이 소모하거나 남겨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말 수가 적고, 빵의 남용과 낭비를 경고하는 빵집 아저씨는 ‘세계’를 상징합니다. 그 무뚝뚝함을 보면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는 도덕경의 어구가 떠오릅니다. 세계가 대지를 낳으면서 들려준 수많은 얘기들은, 인간으로서는 딱 집어 정의하기 어려운 세계의 사연들입니다.

<3> <빵>이라는 작품 자체가 <작가>라는 길에 대한 슬픈 인식일 수 있겠습니다. -마술정원-

그렇다고 볼때. 세계가 낳은 대지(아저씨가 구운 빵)와 정서적으로 교감하는 것, 내 말을 들어주고 내 배도 채워주고 내 인간관계의 재료가 되어주고 결국 사라지는 빵(대지)의 진리를 포착하는 것이, 예술의 목적이고 작가의 길입니다. 이렇게 물리적인 대상을 예술화하는 것, 문학적 환상으로 써내는 것이, 그 존재의 현실을 더 극적으로 드러냅니다. 이 작품 읽고 나면 며칠간 빵 보면 기분 삼삼해집니다. 다른 예를 들면, SF명작 ‘인터스텔라’를 보고 나서 ‘아 자연보호해야겠다’라고 생각하는 분은 별로 없으실겁니다. 하지만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보고 나면, ‘아 강에다 뭐 함부로 버리면 안되겠네’라는 생각들죠.

마지막으로, 현실적인 아이러니는, 주인공이 실업자로서 빵과 대화 나누는 시기가 작가의 길이며 진리와 예술의 길이라면, 합격 전화를 받고 직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빵과 단절되고 다시 비예술, 비진리, 퇴락한 직장인, 사회인의 모습으로 돌아감을 상징합니다.

<4> 결론적으로 이 <빵>은 양질의 양식이니 작가님의 슬픔을 제가 맛있게 먹겠습니다. -마술정원-

이것은 작가님이 드러낸 빵의 존재의 진리를 마술정원 작가님께서 인수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작가님이 보여준 존재의 진리를 내가 충분히 포착하였으니, 그 고된 예술의 길을 내가 이어 가겠다라는 거죠. 무시무시한 책임감이십니다. 저는 못 먹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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