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삶의 다양한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다 공모(감상) 브릿G추천 공모채택

대상작품: 어쩌다, 시를 (작가: , 작품정보)
리뷰어: 양하쓰, 19년 12월, 조회 64

어쩌다 ‘시’를 읽게 되었다. 브릿G에서 시를 접하게 되다니 흔치 않은 일이지만,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 사실 전공이 국어국문인지라 시 공부도 많이 했었지만,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세월이 지나니 시를 읽지 않게 된 것도 사실이고, 원래 취향이 소설을 선호했기 때문인 것도 같다.

어쨌거나 ‘어쩌다, 시를’에 수록된 9편(19/12/29 기준)을 읽고 짧은 각 시에 대한 짧은 감상을 남기고자 한다. 매우 개인적인 감상이어서 내가 느낀 것이 작가가 의도한 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리뷰를 보는 모든 분들께서 이런 점을 감안해주셨으면 한다.

 

 

<체조하는 사람들>

나는 체조하는 사람들을 무작정 따라한다. 여기서 겁먹었다는 건 무엇일까. 소녀는 체조하는 사람들을 따라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사람들이 하니까 무작정 따라해야 한다는 현실이. 새벽부터 시작되는 적막 속의 음악이. 누군가가 하는 일이라고 해서 나까지 똑같이 실천해야 하는 것일까. 과연 그럴까. 사회로부터의, 타인으로부터의 강박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열차에 두고 내린>

열차에 탄 사람들은 열차에 발을 두고 내려 투명해진다. 여기서 나는 친구와 만나기로 했는데 유서에 대해 고민한다. 친구는 멋드러지게 썼다는데 나는 유서 한 장에 친구의 비밀을 모두 담을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우리의 몸은 끊임없이 이동하지만 정신은 어딘가에 부유하고 있는 것 같다. 열차에 실려 쉴 새 없이 움직이지만, 실은 얼이 빠져 있듯이. 우리는 잘 살고 있나, 삶이 괜찮은지 묻고 싶어지는 시다.

 

<오랜지를 먹는 동안>

오렌지? 오랜지? 아마 현재의 화자와 7살 어린 시절의 화자가 등장하니 시간의 흐름을 의도한 말장난인 듯싶기도 하다. 작품 속의 ‘7살의 너’는 화자 자신일지도 모른다. 스스로가 귤이 먹고 싶다 했으면서 오렌지를 까고 있는 오래 전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앞쪽만 너덜너덜해진 시집들과 오래 비워둔 일기장, 그밖의 것들로 미뤄보아 이 화자는 참 고집이 세다. 취향이 확실하다. 원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만큼 앞으로 진전하지 못한다는 느낌이다. 어린 날의 내가 지금의 내가 겹칠 만큼. 마지막 연에서 이건 확실해진다. 내가 여러 번 곱씹고 따라 쓴 문장에서 너를 만났으니.
자아를 돌아보는 일은 정말 다양한 방식으로 이뤄진다. 이 시에서는 내 삶의 자취를 따라가며 어린 시절과 다르지 않은 내 모습을 곱씹는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모습이 오렌지 향처럼 시큼하면서도 달큰하다. 자아성찰에 대한 작품으로 읽었다.

 

<앞으로 나란히>

화자는 바지를 사 입으며 느꼈던 점을 시로 그려냈다. 내가 사입은 바지는 사이즈가 딱 맞는 게 없어서 참 아쉬웠다. 그건 마치 구름이나 별처럼 가질 수 없는 것과 같았다. 고층 아파트에도 살고 싶은데 살 수 없었던 나는 지하에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부러웠던 친구가 내 앞에 서 있었다. 나는 팔이 조금만 더 길었다면 친구를 밀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한다. 친구에게 느꼈던 질투와 열등감이 무척 슬프다. 우리가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회한이 느껴진다. 누구나 남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는 마음과 열등감이 있다. 그래서 공감이 갔다.

 

<반찬>

반찬처럼 냉장고에 숨고 싶지만, 나는 반찬이 아니다. 도망칠 수 없는 현실은 꼭 ‘냉장고 문’과 같다. 꼭 닫혀 있어야 하는 것. 나는 열어두고 싶지만, 열어두면 안 된다고 세상은 늘 나를 가둬둔다.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냉장고와 바깥을 오고가고 싶지만, 무엇 하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왜 세상이 정해놓은 대로 해야 하는지, 왜 냉장고 문은 닫혀 있어야 하고, 반찬은 냉장고 안에만 있어야 하는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답답함이 올라왔다. 내가 숨고 싶을 때 숨을 수 있는 곳은 냉장고가 아니지만, 차라리 냉장고라도 있는 것이 다행인 것만 같다. 조금은 난해했지만, 전체적으로 답답함이란 감정이 느껴졌다.

 

<오늘은 이불 속을 나올 수 없었다>

울음에 젖어 이불 속에 파묻힌 채 살아가는 나. 이불 밖에서 우는 이들의 아픔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고, 그래서 이불 속에서 하루 종일 스스로를 가두었다. 물에 담겼던 곰 인형, 덜 마른 옷. 이불 속은 이해할 수 없는 이들로부터의 피신처였다. 나는 타인을 이해하고 싶지만 그들과의 장벽을 쉽게 허물기는 너무 힘들다. 그래서 이불 속에 나를 가두었다. 나는 나대로, 타인은 타인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현실이 슬프지만, 구태여 바꾸려 노력하지 않는다.

 

<기다리는 밤>

내가 원하는 운명이 찾아오길 간절히 기다린다. 화자는 ‘와준다던 삼재’를 기다리고 있다. 그 삼재는 복이 될지 악이 될지 아직 모르지만, 나는 사인펜으로 그려 번져나간 손금을 지우며 악재를 지우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는 분명 순간순간 원하는 운명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모양대로 운명은 찾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그 운명을 바꾸려 애쓰는 것이다. 그러나 맘대로 되지 않는 것도 분명 있는 법이다. 거기서 벗어나려 애쓸수록 우리는 실체에 가까워진다. 바꿀 수 없는 것은 두고, 앞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하수구>

고양이, 죽은 희망, 비밀, 온갖 쓰레기와 잊혀진 것들이 정체되어 모이는 곳이 하수구다. 이렇게 하수구는 계절마다 층층이 쌓이는 절망과 비명은 정체되고 소외된 것들의 집합소가 된다. 참담하고 슬프다. 더러운 것과 비극들이 모여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 된다. 아무도 찾지 않는 하수구에는 한때 생명이었던 것들이, 소중했던 것들이 죽어가는 곳이다. 외로움이 느껴진다. 우리도 하수구처럼 잊고 살아가는 것이 있는 건 아닌지, 혹은 우리 스스로가 하수구에 있는 것처럼 잊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허수아비>

한 곳에 붙박혀 움직일 수 없는 허수아비는 새들의 무덤이자, 이별에 중독된 존재이다. 그는 사실 누군가를 부르고 싶지만, 그러지 않는다. 그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혼자서 들판을 지키는 것이므로. 그는 외로움을 무릅쓰고 제 역할을 다한다. 한 자리에 우뚝 서서 모든 것을 관망하며 변함없는 모습으로.

 

 

이상 리뷰를 마친다. 소설과 달리 시에 대해서는 정말 아는 것이 없고, 나름의 기준이나 정해진 틀도 없어 그저 느낀 점만 나열했다. 소설처럼 분석적인 리뷰를 할 수 없어 아쉬웠지만,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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