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숲속의 기사님>을 읽으며 예전에 읽었던 김숨의 소설 <너는 너로 살고 있니>가 떠올랐다. <너는 너로 살고 있니>의 화자는 무명의 연극배우 ‘선희‘다. 스쳐 지나가는 단역으로서 무대에서 단 한 번도 주인공이 된 적이 없는 ‘선희‘는 편의점 아르바이트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일상에서도 특별히 주목받지 못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녀의 삶에 변화가 찾아온 계기는 그녀가 새로운 일자리를 찾으면서부터다. ‘선희‘는 경주의 한 병원에서 11년째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있는 ‘경희‘의 간병인으로 일하면서 누구에게인지 모를 편지를 쓰며 ‘내가 나로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선희‘는 자신의 삶을 오롯이 체감하지 못한다. 마치 짝이 아닌 받침대 위에 생뚱맞게 올라가 있는 찻잔처럼 그녀는 그녀와 그녀의 삶이 어우러지지 못하고, 자신의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그녀는 자신이 경험하는 일상이 누군가의 행복했던 과거나 어슴푸레 다가올 미래 같기도 하지만 결코 현재의 내 것은 아닌 것 같은 감정을 느끼며 살아간다. 상실과 결핍의 경험은 삶의 온도를 변화시킨다. 상실과 결핍의 경험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공간 감각을 둔화시키기 때문이다. 손을 뻗으면 그 뻗은 손을 누군가 잡아줄 거라는 믿음, 누군가를 믿고 허공으로 손을 내밀 수 있는 용기가 ‘선희‘에겐 결여되어 있다. 그렇게 그녀는 하나의 섬이 된다.
‘선희‘가 삶의 온기를 느끼는 유일한 대상은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있는 ‘경희‘다. 그 이유는 ‘경희‘의 눈 깜빡임, 분절음 섞인 호흡 속에서 부드럽고 따뜻한 삶의 숨결을 느꼈기 때문이다. 마치 가벼운 손짓과 미세한 고갯짓에 이르기까지 의미 없는 행위란 없는 연극처럼 ‘선희‘는 모두가 아무 의미 없는, 무의식적인 반사반응이라고 말하는 ‘경희‘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는 ‘선희‘가 ‘경희‘를 만나기 전에 살아온 세상을 거짓과 가식, 무의미로 뒤덮인 것으로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선희‘는 세상이 요구하는 역할을 잘 연기하는 배우들 보다 오직 생명을 이어나가기 위한 ‘경희‘의 거친 호흡에서 위안을 얻고 동질감을 느낀다.
“현대인은 재앙과 피곤한 일상을 구분할 수 없었다.”
<잠자는 숲속의 기사님>의 화자도 10년이 넘게 잠들어 있는 연인을 돌보고 있다. 한때 자신을 사랑했고 세상을 향해서도 다정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연인은 갑작스러운 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어 장기투병을 하고 있다. 화자는 자신의 삶과 가정에 상실과 결핍을 가져온 개인적 불행을 딛고 새로운 삶에 적응하면서 이를 새로운 일상으로 받아들이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하지만 재앙과 피곤한 일상을 구분할 수 없는 현대에서 이런 개인적 불행은 사회적인 불행으로 확대되게 된다. 상실로 인한 고통을 가까스로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던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마녀’라는 존재는 다시 한번 그녀의 일상을 무참히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마녀’는 전세계로 퍼지고 있는 불면의 원인은 ‘잠의 균형’이 깨졌기 때문이며, 이에 대한 원인으로 생각지 못한 것을 지목한다. <잠자는 숲속의 기사님>은 삶의 예측불가능성, 사회의 부조리를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소설이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대답은 ‘인간‘ 안에 있다는 것 아닐까? 비록 지금은 차갑게 식어가고 있지만 한때는 다정하고 따뜻한 ‘인간‘이었고, 우리도 그와 같은 ‘인간’이기에 포기할 수 없다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