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린 놈은 발 뻗고 못 잔다는 말이 있습니다마는, 어디까지나 맞은 놈의 희망사항이고 실은 때린 놈이 더 잘 자고 잘 먹고 잘 삽니다. 맞은 우리만 반 세기 넘도록 끙끙 앓고 있지요. 일본은 틈만 나면 메이지 부터 쇼와 시대를 자신들의 벨 에포크인 양 추억팔이 하지만, 서글프게도 우리의 일제강점기는 그렇게 아름답게 그려낼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당시를 조금만 긍정적으로 표현해도 잘 해야 식민지 근대화론자, 나쁘게는 일뽕이 아닌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가 쏟아졌지요. 오죽하면 깡패를 독립운동가로 만들어 놨겠습니까? 그러나 당연히 그 시절의 사람들도 독립운동만 하고 살지는 않았을 것이고, 비교적 최근에 들어서 경성을 ‘모던 껄’들과 ‘모던 뽀이’들의 공간으로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역시 식근론의 바탕이 된다며 경계하는 의견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뭐든 획일적인 건 아름답지 않지요.
2등 시민인 조센징인 것도 서러운데 조센징 여성인 것은 더 서러웠던 그 시대에도 마치 신화처럼 배우고 깨치고 활약한 여성들은 있었습니다. 아직까지 남아있는 몇몇 학교들의 전신이 된 여학교들이 그런 분들을 키워낸 요람이 되었겠지요. 물론 모든 학생들이 계몽한 신여성이 되겠다는 각오로 수학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작중에 나타나듯이 혼사를 위한 액세서리 용도로 학력이 필요했던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니까요. 아무튼 본 작품은 그런 희망과 허영이 뒤섞인 공간에서 일어난 비극의 전말을 추적해 갑니다. 아, 스포일러도 있겠지요.
1927년의 경성을 배경으로 5년 전 여학교에서 일어났던 비극적인 사건의 진상을 탐정 만영이 의붓오빠의 의뢰를 받아 파해쳐 나가는 소설입니다. 그리고 과거의 시점에서 사건의 당사자인 세령의 시선이 교차되고 있지요. 따라서 사건은 과거를 향하기도 하지만 현재로 흘러오기도 하면서 입체적으로 조명됩니다. 덕분에 읽는 사람으로서는 지루할 틈 없이 이야기가 전개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앞서도 이야기했듯 조선의 근대란 일제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긴 하지만, 여러가지 의미로 경천동지할 변화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문물만이 아니라 새로운 사람들도 등장했지요. 바로 그 부분을 조명하는 점이 읽는 동안 약간 신나기까지 했습니다. 무려 스팀 난방시설을 갖춘 여학교의 학생들이 주말이면 혼마치를 누비며 백화점 쇼핑을 하고, 아침식사로 크루아상을 먹으며 장차 의사가 되겠다는 포부를 이야기하는 곳이라니, 허구헌날 서대문 형무소 앞에서 독립투사 남편을 기다리거나 일본군인 옆에서 술이나 따르던 역사물 속의 조선 여인들과는 확연히 다른 매력이 느껴졌습니다. 특히 ‘신식’문물들에 대해서는 역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 보니 읽는 동안 이게 벌써? 싶어서 몇 번이나 구글의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미 20년대에 이 땅에 등장했던 것들이 참으로 많더군요. 과연 얼리어답터의 민족답습니다.
그리고 인물들에 대한 묘사도 생동감이 느껴졌습니다. 특히 세령의 파트에서, 같이 생활하는 마리아 뿐 아니라 코티분을 둘러싼 다른 동급생들의 행동양식에서 까지도 작은 사회에 대한 세밀한 시각이 느껴졌습니다. 물론 가장 중요한 세령과 마리아 사이의 긴장감과, 짝사랑(이라기 보다는 서툰 관계가 아닐까 싶지만)이라는 재난에 직면한 세령의 심경을 와카(와카가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일문학에 대해서도 문외한이라…)를 통해 결부시킨 점이 세련된 한편으로, 일제강점기라는 배경과 맞물려 설득력있게 느껴졌습니다.
이것도 편견이라면 편견이겠지만 사실 처음 작품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갈등의 중심이 여성으로서 근대사회에서 받는 차별이 되지 않을까 짐작했지만 의외로 중심이 되는 소재는 돈이었습니다. 물론 해당 문제도 여고보 학생들의 진로 문제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나타나긴 하지만, 백화점에도 여성고객을 위한 남성 점원을 배치하는 점이 언급되는 등 작중의 여성들이 무조건적인 피억압자로 그려지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그 힘은 역시 돈이지요. 사건이 비극으로 치닫는 원인도 결국 돈입니다. 행방이 묘연해진(실은 묘연하게 만든) 10원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바로 마리아는 다른 학생들과 달리 부자가 아니라는 점에 있었지요.
본 작품은 당시 상황에서 돈의 힘을 충분히 만끽하는 사람들을 그려냅니다. 나주 만석꾼의 딸로 미쓰코시 백화점에서 이름만 대면 알만한 유명인사가 된 이영희가 대표적이라 하겠습니다만, 다른 여학생들도 유럽제 화장품을 사용하고 기숙사가 호텔방으로 보일 정도의 생활을 누린다는 점에서 조선 사회에서 어떤 계층에 있는지 능히 알만 합니다. 또한 주인공인 만영 역시 점심으로 스페인 요리를 먹고 스카치 위스키를 즐길 정도로 수준 높은 취향의 소유자입니다. 위스키라는 점보다는 위스키 이름에 더 많은 함의가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제법 화려합니다.
아쉬운 점은 그 화려함에 대비되는 차가운 가난이 제대로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가난은 무서운 질병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밀어내게 만들 정도로요. 그러나 마리아 파테는, 고학생이며 그 때문에 문제의 용돈 출납을 맡게 되었고, 더 중요한 미야지마 선생과도 얽히게 되었으나 실제로 마리아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는 모호합니다. 기숙사다 보니 어차피 기본적인 생활은 다른 학생들과 비슷할 수밖에 없지만, 대체 마리아가 어떠한 연유로 가난하며 – 프랑스인 부부가 원래 가난했던 것인지 – 대체 얼마나 곤궁하기에 세령에게도 비밀로 하고 돈벌이를 찾을 수밖에 없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극단적인 선택의 이유도 약간 당혹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좋게 생각하면 여러 방향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지만 독후감은 뭔가 덜 읽은 느낌에 가까웠습니다.
또한 전반적인 등장인물들의 수준(물질적인 면이든 정신적인 면이든)이 높다 보니, 역사가 배경인 소설임에도 역사성이 상당히 희석된 점이 아쉬웠습니다. 단적으로 이동수단만 해도 버스와 택시가 등장하는데, 그 유명한 운수 좋은 날의 배경이 20년대입니다. 등장인물들이 당시 시대상 보편적인 교통수단을 이용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기숙사 학생들이 나누는 이야기도 몇몇 소재를 제외하면 묘하게 현재 고등학생들의 대화와 별 차이가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1919년과 1926년에 지금으로서도 굉장히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났는데 시국이 험하니 집에 갈 때 조심해라 정도로 넘어간 점은 퍽 아쉬웠습니다. 앞서 말했듯 역사가 배경인 소설이라고 꼭 등장인물이 독립운동을 할 필요야 없겠지만, 그래도 역사와 유리되어서는 배경이 주는 매력이 반감되겠지요. 특히 모티브가 된 것으로 추정되는 학교의 선배 중에 독립 영웅이 계시다 보니 더욱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한편 탐정 만영은 매력적인 캐릭터입니다만, 본 작품에서는 탐정으로서의 활약 보다는 단순히 이야기를 듣는 수준에서 그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사 청취도 물론 엄연히 탐정의 업무고, 이야기를 듣기 위해 유가족이나 여고보 선배를 사칭하기도 하지만 만영의 기법에 비해 사람들이 심하게 협조적인 것이 문제입니다. 특히 별로 좋은 일도 아닌데 유족이 왔다고 해서 다른 학생들의 성적이며 주소까지 알려주는 교직원은 옛날에도 없었을 듯합니다. 그보다도 이런 식이라면 사실 의뢰인인 세자르 파테가 직접 돌아다녔어도 별반 차이가 없었겠지요. 만영에게 의뢰한 이유가 조선 말을 못해서라면 어쩔 수 없었겠지만. 어쨌든 조사 과정에서 좀 더 우여곡절이 필요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줄이자면 독특한 배경설정과 주인공의 섬세한 심리묘사가 멋진 작품이었으나 전개과정과 몇몇 디테일한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는 감상입니다. 특히 마리아 파테의 개인사에 대해서는 더 설명될 부분이 많았다고 생각하는데, 종장에서 너무 빠르게 정리되었다고 느꼈습니다.
완결 연재란에서 보고 무턱대고 읽기 시작하다 보니, 다 읽고 나서야 이 작품이 탐정 만영을 중심으로 하는 시리즈물의 일부라는 점을 파악했습니다. 그래도 독립적인 작품인 만큼 일단 전작을 읽지 않고 본 작품만 읽고 리뷰를 작성했는데요, 기회가 된다면 앞의 시리즈도 읽어보고 싶을 만큼 재미있는 소설이었습니다. 작가님의 건필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