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게 자란 손톱을 깔끔하게 깎았다. 손톱이 길어 키보드를 치기 불편했다. 긴 손톱이 잘려 나간 자리를 잠시 노려보았다. 크툴루의 검은 눈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크툴루 신화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 ‘러브크래프트’ 와 ‘문어 괴물’정도가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의 전부이다. 이런 상황에서 예기치 않게 ‘크툴루 라이징’을 리뷰하게 되었다. 리뷰에 부족한 점이 보인다면 너른 마음으로 양해해 주기 바란다.
크툴루 신화를 처음 접하는 사람을 위해 위키의 내용을 소개하겠다.
‘크툴루 신화’의 대략적인 세계관은 인류 출현 이전의 지구에서 인간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기괴한 외계종족들과 초월적 존재들에 대한 공포를 묘사하는 데 근거하고 있다. 크툴루 신화에서 인간은 신의 관심을 받는 존재가 아닌, 보잘 것 없는 일개 종족으로서 거대한 우주의 신비와 공포스러운 비밀들,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존재들에게 압도당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곤 한다. 이 미지에 대한 공포를 바탕으로, 나아가서는 미지 그 자체인 고대 문명과 외계의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가 곧 크툴루 신화의 골자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엘더 갓’과 ‘아우터 갓’이 존재한다고 한다. 엘더 갓은 선한 쪽 아우터 갓은 나쁜 쪽으로 단순히 이분법 할 수는 없지만, 편의를 위해 그렇게 분류하겠다. 작가의 이름이 ‘OuterSider’라는 것은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문득, 호러소설 작가들은 삶이 어땠는지 궁금했다.
카프카(호러소설 작가인지는 모르겠지만)는 자신의 작품을 태워 달라고 하며 죽었다. 평생에 걸쳐 신경쇠약 때문에 힘들어 했다. 포는 알콜중독과 정신착란으로 힘들어 했다. 러브크래프트는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 아마도 작가들이 ‘공포를 마주한 대가’가 아니었을까? 아니면 힘든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공포문학에 관심을 기울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들은 마주한 공포를 벗어나기 위해 혹은 공포를 마주하기 위해 문학을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연히 본 텔레비전 광고가 생각난다. 가족 세 명이 부엌에서 식사준비를 하며 대화를 한다. 엄마가 아들에게 물었다. ‘호빵’이 요즘 유행이야? 아들은 침을 튀기며 요즘 유행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야기가 끝나자 옆에서 듣고 있던 딸이 말한다. 그건 오빠가 ‘호빵을 좋아하는 사람’끼리 모인 곳에 있으니 ‘유행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엄마와 딸이 차리고 있는 평범한 저녁 식사에는 호빵이 없었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잘 표현한 광고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자기가 사랑해 마지않는 (혹은 자신의 머릿속을 점령한 크툴루의 명령에 의해) 이야기를 어떻게 보통 사람에게 전달 할 수 있을까? 물론 끝내주는 이야기가 있다면 다행이지만, 대부분의 작가에게는 그런 것이 없지 않은가.
나는 ‘크툴루 라이징’의 시작인 “그 여자애는 단지 수신자였고, 그 놈들은 그 애의 몸에 들어온 탑승객이었을 뿐이야.” 이 문장이 좋았다. (대부분의 작가는 등장인물의 대화가 나오기 까지 배경 설명이 너무 많다. 자신의 글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하나하나 설명을 해야 독자가 알아들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스타일이 그런 작가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크툴루를 잘 모르는 나도 이 한 문장으로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 생겼고, 의식의 바닥 어디선가 간질간질 한 느낌이 들었다.
첫 문단을 읽으며 내 머릿속은 ‘킹스타일인가? 아니면 헐리우드 B급 호러 스타일? 내면에 문제에 대한 외면의 저항? 개인과 집단의 싸움? 정신병? 외계인 혹은 신 앞에 철저하게 무너져 내리는 주인공? 스스로 감옥에 들어가나? 친구가 친구를 죽일까? 부서진 몸을 지탱하는 정신? 아니면 정신을 지탱하기 위해 스스로 육체를 부시는 내용인가?’ 이상이 ‘1화’가 내게 준 선물이었다.
크툴루 라이징에는 세 명이 등장한다. 김동률과 황지안 강헤령이 주요 인물로 나온다. 지안은 헤령 때문에 미지의 존재에게 감염당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열여섯 명을 죽였다. 그리고 그에 대한 기억이 없다. 흥미롭지 않은가? 더군다나 지안은 오른 손과 두 발을 잃은 상태다.
하지만 1화 이후로 모든 흥미가 사라졌다.
일단 문장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않겠다. 세 번째 리뷰이고 계속해서 문장에 관해 이야기 하기에는 내가 힘들다. 아마도 이쪽은 퇴고를 많이 하지 않는 것이 관례인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취향의 문제도 있다. 나는 한 문장에 하나의 이야기가 있는 것을 좋아한다.
웹 소설에 문장이 제대로 써있지 않은 이유가 여러 가지겠지만, 그 중에 작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 속의 세상을 잘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모르는 것을 표현 하려고 하니 중언부언 하는거라고 생각한다.
‘환상 소설가의 조수’라는 단편이 있는데, 소설을 쓰는 사람들에게 꼭 읽어보라고 권해주고 싶다. 이 책의 중간에 소설을 쓰는 방법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소설을 쓰는 방법에 대해 묻는 조수에게 환상 소설가는 “시간과 공간을 찢고 들어가 그 세상에서 실컷 놀다온 이야기”를 쓰라고 조언한다. 아마도 카프카 나 포, 러브크래프트는 그랬을 것이다.
‘크툴르 라이징’은 그랬을까?
여행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잘 표현 했는지에 대해서는 말 할 수 있다. 전혀 잘 표현하지 않았다. 작가는 ‘미스터리를 쓰는 방법’의 174-175페이지를 꼭 읽어보기 바란다. 문장을 쓰는 기술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고, 나는 작가가 충분히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확신 할 수 없지만 작가가 글을 쓰다가 중간에 에너지를 모두 소비해 버린 느낌이었다.
크툴루 라이징에서 ‘라이징’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크툴루 신화를 통한 문학에 대한 역습? 혹은 소설 이야기 자체에 나오는 크툴루의 세상 정복? 정확히 알 수 없다. 소설을 다 읽었지만 ‘라이징’이 뜻하는 바를 잘 모르겠다. 작가 코멘트에 ‘우주적 공포’를 전하겠다고 했는데, 공포에 갇힌 작가(자매의 이야기는 마치 자신의 이야기처럼 보였다. 묘사가 아주 좋았다.)는 보여도 독자인 나에게 공포가 전해지지 않았다. 아마도 왔다 갔다 하는 시점과 부족한 분량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크툴루 라이징’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웹소설이 삼인칭 작가 시점과 전지적 작가 시점을 구분 없이 사용한다. 전지적 작가시점은 독자에게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아지지만 그만큼 독자가 참여할 부분이 적어진다. 감정이입이 차단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전지적 작가 시점을 잘 못 사용하면 글이 늘어지고 관념화 된다. 독자는 그런 글을 끝까지 읽을 확률은 상당히 낮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인터뷰에서 ‘일인칭으로 글을 쓰다가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 삼인칭으로 바꿨으며 그 시도가 쉽지 않았다.’고 했다. 작가에게 문체와 시점은 글을 쓰는 동안에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는 중요한 문제다.
그리고 작가가 표현 하고자 한 ‘공포’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다. 이상한 그림까지 첨부하며(소설가가 이런 자료를 첨부한다는게 기본적으로 이해가지 않는다. 자료집이 아닌 소설 아닌가. 심지어 작가가 그린 이미지도 아니었다. 크툴루 관련 소설이 원래 이런식인지는 잘 모르겠다.) 노력했지만, 독자로서 크툴루에 대한 이해도, 소설이 주는 공포도 없었다. 가장 아쉬운 부분이었다. 공포 소설을 읽는 이유는 ‘공포’를 느끼기 위해서 라고 생각한다. 이를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1화 이후 작가는 독자에게 훨씬 심도 있는 크툴루에 대한 이야기와 공포를 보여줄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시 한 번 생각해도 이 부분 만큼은 아쉽다.
작가의 크툴루에 대한 지식과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구성을 보면 ‘크툴루 라이징’을 중편으로 잘 마무리 했다면 ‘브릿G’의 호러 부분 상위에 랭크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이상으로 몇 가지 아쉬움을 남기며 크툴루 라이징에 대한 리뷰를 마치려고 한다. 내가 리뷰에서 늘 말하는 ‘나는 이 작품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사랑하거나 미워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하지만 지금은 내 입장을 표명 하고 싶지 않다. 나중에 ‘크툴루 라이징’이 보다 완성된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모든 호러 작가가 괴로운 인생을 보냈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작가들의 인생이 그리 편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이 크툴루와 호러 소설을 쓰는 작가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다.
작가는 공포를 창문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창문 앞에 서 있는 것은 독자가 할 일이다. 공포와 마주할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창문으로 보호해 주어야 한다. 하지만 작가는 공포와 손잡을 정도의 각오는 해야 한다. 그래야 작가가 느낀 ‘그’ 공포를 독자들에게 잘 전달 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