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이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어 일독에 주의를 요합니다.
0-2.
그것은 우연일지도 모릅니다.
1.
소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러시아어를 전공하는 소설 속의 나는 아마도 레니라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지만, 좋아한다는 말을 고백도 못한 채 먼 곳으로 떠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모스크바로 가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탑니다. 그리고 나는 열차 안에서 사샤를 만나게 됩니다. 할 것도 없는 지라 나는 사샤와 함께 술을 마시며 이야기하다가 곯아 떨어집니다. 그렇게 일어나고 보니 자신의 배낭은 누군가 훔쳐 갔는 지 자리에 없었습니다. 나는 수소문하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사샤의 호의에 기대 어느 수도원에 가게 됩니다. 그 곳에서 사샤가 권하는 ‘진통제’를 먹고 비극은 시작됩니다. 진통제는 알고보니 헤로인이었던 것입니다.
마약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공항에서 가방을 맡아줬는데 그 안에 마약이 가득 들어있어서 잡혀갔다는 이야기도 종종 들립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약이 유통되며 많은 이들을 병들게 하고 있다고도 합니다. 점점 삭막해지는 삶의 조형 속에서, 병의 원인은 아주 우연한 선의처럼 보이는 악의에 의해서 그런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요.
2.
bluewhale 작가님의 소설 부서진 성상은 일종의 이니시에이션(initiation) 소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해당 소설 장르는 성년식을 생각하시면 이해하시기 쉬우실 겁니다. 즉 어린 아이가 성인 세계에 진입하면서 겪게 되는 삶의 파고와 고통, 그리고 성장통을 주로 이야기합니다. 여기에 bluewhale 작가님은 변주로 미스터리를 섞어냅니다. 여행에서 겪을 수 있는, 어쩌면 가장 지독한 일을요.
어린 아이는 성인 세계로 진입하면서 ‘통과제의’를 치르게 됩니다. 그 과정은 어렵고 지난합니다. 아이로써 가졌던 것을 버리고, 날서고 거친 어른의 기준을 새롭게 가져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아이는 상처 받지만 동시에 상처를 간직한채로 나아갑니다. 일반적인 이니시에이션 소설은 이렇습니다.
평범한 소설이었다면 주인공은 자신의 사랑을 그리워하며 러시아의 쓸쓸함을 감상하다가 한국으로 돌아갔을 겁니다. 그곳에서 지루한 일상을 보냈겠죠. 그러나 소설은 무구했던 주인공이 범죄자로 전락해버리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우연한 만남에서 비롯된 사샤의 면면은 통과제의를 수행해야하는 작은 영웅의 조력자 모습을 띄는 듯 합니다. 그렇게 선의로 주인공을 배려하고 잘 곳과 먹을 것을 내어주는 장면에서 우리는 미처 그의 악의를 짐작할 수 없습니다. 과연 언제부터 악의는 시작된 걸까요.
악의가 우리의 사고를 침식했음을 눈치챈 순간, 그 때는 너무 늦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범죄 소설적인 코드가 개입합니다. 사샤의 저의가 드러난 순간, 그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들이 의심의 대상이 됩니다. 같이 마셨던 술은 과연 멀쩡한 술이었을까요? 그리고 배낭의 행방은요? 함께했던 모든 순간들의 저의가 의심되면서 소설의 긴장은 극에 이릅니다. 과거의 모든 행동들이 찜찜하게 느껴집니다. 동시에 소설의 찜찜함으로 시작되었던 긴장은 전말이 밝혀지면서 긴장은 해소됩니다. 서로 상충되는 듯 하지만 둘의 레이어는 다소 다릅니다. 긴장의 확산은 범죄라는 사실에서 기인하여 갈등의 최고조에 이른 것이라면, 긴장의 해소는 감춰져 있던 것이 드러나면서 발생하는 앎의 해소입니다. 그리하여 주인공은 헤로인에 취한 채 운반책이 됩니다. 이니시에이션의 결말이 성인이 되는 것이 아닌, 범죄자로의 영락인것이죠.
3.
이 지점에서 소설 내 배치된 상징물들이 눈에 띕니다. 사샤가 정원사라는 것은 얼핏보면 상냥함을 드러내는 장치로도 보이지만, 사실은 마약 세력을 다듬는 존재로 해석될 때에는 의미심장합니다.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성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적을 이야기하는 수호 성인을 부순다는 것은 그 만큼 주인공이 망가져 있음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샤와 이야기하면서 시내 진입로로 들어가는 장면은, 마지막 마약을 부탁하는 장면에서 이미 중독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장치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주인공이 사샤와 만난 것은 우연일까요. 어쩌면 우연은 맞을 겁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 마주칠 사람을 맘대로 정할 수 있을리는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어쩌다 마추친 외국인 청년을 노린다면 그 것은 가능한 이야기가 됩니다. 적당한 사람들을 골라 자신의 마약 왕국을 조경하는 행위는 어쩐지 무섭고 괴기스럽게 느껴집니다.
결론적으로 bluewhale님의 부서진 성상은 이니시에이션 소설 장르로 읽히면서도 미스터리라는 요소를 통해 이를 비틉니다. 그러면서도 사샤라는 사람의 양면성을 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섬뜩한 악의를 가진 자로 묘사합니다 그리하여 결말에서 긴장의 긴박한 해결을 선사합니다. 그리고 이 피해자이자 공범이 된 주인공이 우연히 그 대상이 되었다는 점에서 묘한 공포감을 형성합니다. 우연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연이기에 두렵습니다. 선연한 악의가 두려운 작품 ‘부서진 성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