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클리벤의 금화는 이런 전제에서 시작한다.
상대가 말이 통하는 대상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크고 작은 갈등들을 마주하는데 그 갈등을 해결하는 가장 평화롭고 지적인 방법은 대화로 해결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주도적으로 그 대화, 즉 교섭을 시작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울리케다.
울리케는 여기에 탁월한 재능을 타고났는데 용의 만찬으로 바쳐질 뻔하다 “너를 먹겠다”라는 용의 식전 선언에 용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대상임을 알아채고 자신은 식용에 적합한 근거가 없다는 주장을 필사적으로 역설한다. 그렇게 합의점이 맞은 용과 울리케는 먹는 이와 식사의 관계에서 언약을 나누는 교섭관계로 관계가 바뀌고 용의 아가리에서 생환한 직후 고블린무리의 포로가 되는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 두 차례 연속으로 일어나지만 울리케는 염소 오백 마리를 바칠 것을 요구하는 고블린의 말에서 교섭의 여지를 발견하고 서로에게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하여 그들을 설득시킨다. 그리고 고블린과 그녀의 관계 또한 암묵적 적과 포로의 관계에서 교섭주체와 대사의 관계로 바뀐다. 여기서 울리케는 고블린 대사라는 전대미문의 직책을 얻게 된다. 사실상 울리케가 그 직책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오우거, 트롤 등과 같은 마수들을 다루는 서리심의 무녀가 눈보라와 함께 들이닥쳤을 때에도 울리케는 서리심이 소통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이야기를 하고 싶다며 대화를 요청한다. 그리고 그 교섭을 통해, 서리심과, 고블린, 피어클리벤의 관계 또한 바뀐다. 이는 모두 울리케가 해낸 성취다.
피어클리벤의 금화가 재밌는 것은 이게 판타지 세상에서 일어나는 교섭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우리가 결코 전제해본 적 없는 요소들을 고려해야 하는 교섭들을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생산자나 도축자, 혹은 유통자가 아닌 음식의 입장에서 식사에 대한 교섭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이익과 손해의 저울질에 관심이 없는 인간을 벗어난 존재와의 소유권 분쟁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이게 이 작품을 참신하게 만든다.
인간이 아닌 대상과 교섭하기 위해 독특한 요소들을 고려한다는 게 억지라고 생각될 수도 있으나 이는 그저 합리적인 선택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이 세계에서 류그라와 고블린, 용, 인간은 모두 세상을 살아가는 주체이며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선 타인과 소통할 줄 알아야 한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는 그 사회적인 동물이 다른 종들에게로 확장되었고 작가는 그들 모두를 사람으로 묘사한다.
또한 이 작품은 판타지이기 때문에 마법사들과 마법에 대해서도 나오는데, 내가 특히 주목하는 마법은 바로 동물 빙의이다. 마법적 능력만을 따지자면 이는 시시해 보일 수도 있는 마법이다. 빙의를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빙의로 두 몸을 왔다갔다하면서 인간의 몸으로 불가능한 시간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것도 아니고 빙의했다고 해서 빙의한 몸으로 원래 몸이 할 수 있는 기술을 쓸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어클리벤의 금화에서 빙의는 중요한 장치로 쓰인다. 가장 많이 나오는 마법이며 없어서는 서사 진행에 문제까지 생긴다. 빙의한 몸으로 말을 할 수 있지 않은가! 장거리에서도 상황을 살펴보고 교섭할 수 있다. 이는 가히 혁명이며 피어클리벤의 금화에선 이 장치를 누구보다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많은 소설에서 쓰이지만, 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지 않는 문학적 장치가 있다. 바로 특정 인물의 명석함을 드러내기 위해 주변인물들을 바보로 만드는 것이다. 피어클리벤의 금화엔 이런 장치가 없다. 용과 고블린, 류그라, 서리심, 모두가 말이 통하는 지적생명체이며 각자의 사정과 욕구가 있고 그걸 표현할 줄 안다. 이것은 나를 즐겁게 만들고 또 그들과 대화하고 싶게 만든다. 안타깝게도 독자로서 실현될 수 없는 일이지만 나에게 이런 욕구를 불러일으킨 피어클리벤의 금화는 책임감 있게 작중 다양한 교섭을 통해 그 욕구를 충족시켜준다.
생생한 인물들의 대사와 각종 묘사를 읽으며 나는 그 교섭의 참관자의 위치로서 대리만족한다. 앞으로도 나는 그 모든 교섭의 참관인으로서 위치할 것이다. 울리케의 모든 교섭을 참관할 수 있는 독자라는 지금의 위치야말로 이 글을 읽는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운이자 특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