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의 신화라는 말은 흥미롭습니다. 두 개의 단어가 완전히 대척점에 있을 뿐더러 서로를 배격하는 관계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동시에 계몽이라는 것은 신화의 존재를 전제해야만 가능할 수 있습니다. 신, 미신, 어떠한 맹목적 정의, 이 모든 관념들을 깨고 나오는 것이 바로 계몽인 것이죠. 그러므로 계몽과 신화는 양립이 아예 불가능하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바로 그 계몽과 신화의 교차점에, 피어클리벤의 시대가 있습니다.
주인공이 황실로부터 멀리 떨어진 가난한 영지의 영애인 것은 그런 면에서 적합해 보입니다. 울리케에게는 귀족들에게 요구되는 당장의 허례허식이나 충성보다는 실질적인 생계가 더 중요하거든요. 그 생계에 매몰되지 않을 정도의 생활 수준이지만, 그럼에도 이(利)의 추구를 고민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이익이라는 개념을 논의에 가시적으로 가져온다는 것은 변화의 출발점을 의미합니다. 이익은 사실 모든 선택을 좌우하는 기준이지만, 사회의 권력층 입장에서는 그것이 물밑에 잠들어 있는 쪽이 편할 겁니다. 실리보다는 이념을 휘두르는 게 지배에 좀 더 편리하니까요. 따라서 그것이 무너진 이상 나라는 격변기에 들어설 수밖에 없습니다. 울리케가 용 빌러디저드와 부를 논한 순간부터 이는 정해져 있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최대의 이익을 추구하는 수단은 무엇인가 하니, 바로 이성이고 그래서 인간은 합리적 인간 같은 것으로 불리웁니다. 작중 등장인물들은 정말 놀라우리만큼 합리적입니다. 감정적인 모습을 보이다가도 판단하고, 생각하고, 교섭합니다. 비현실적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설정에 따른 쾌감을 무시할 수도 없습니다. 울리케를 위시한 인물들은 불필요한 증오와 이념에 따른 다툼을 최대한 억제하고자 하며, 서로의 이익을 교섭하고자 합니다. 이성은 그렇게 공존을 이끌어냅니다. 피어클리벤과 고블린들, 고블린과 서리심으로 이어지는 이질적인 존재들 사이의 협상은 결국 그들을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 울리케 피어클리벤이 존재합니다. 물론 용의 존재가 필요하지만 구성원 간의 신뢰라는 것은 결국 체제의 안정 이후 쌓이는 사회 자원이니 당장은 어쩔 수 없습니다. 사실 인간의 눈으로 보았을 때 온갖 괴상망측한 존재에게 호의를 사고 있는 울리케 자신이 나중에는 인감도장 역할을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지만요.
이성의 대두에 따라 불가사의한 것은 자연스럽게 점차 해체됩니다. 제국의 강력한 무기인 마법도 파훼될 수 있으며, 제국 지배의 근간인 용도 예외는 아닙니다. 소설이 전개됨에 따라 이 용과 마법이라는 대표적인 힘은 점차 신화적인 어떤 것에서 멀어져 본래의 근본을 찾아갑니다. 심지어 터무니없이 신화적인 생물인 용 빌러디저드 스스로가 무신론자임을 선언했으니까요. 맹목적인 믿음에서 이해로, 이념에서 실리로 이어지는 이 흐름을 추측하는 것은 무척 재미있습니다.
이익에서 출발한 변화는 이익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피어클리벤의 금화는 단지 시작점일 뿐입니다. 기본권의 출발이 재산권이라는 입장에 어느 정도는 찬동하는 편이라, 이 이익의 논의가 끝내는 권리의 확장으로 이어질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울리케가 셰이위르와 같은 길을 걸을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울리케가 바꾼 나라가 지금의 제국과 같은 형태는 아닐 것임은 분명합니다. 이미 제시된 고블린들의 정치 체계에서 새로운 국가의 기반을 연상할 수 있죠. 밑으로부터 위까지 합의에 이르는 형태,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모양새 아닌가요? 울리케는 작중에서 일찌감치 영감을 받았고, 그래서 아마 ‘왕’은 되지 않을 겁니다. 이러한 새 국가는 부의 분배, 사회의 기간을 제시한 크누드의 견해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는 사회 구성원들은 나아가서 국가의 지도자에게 요구할 권리, 의견을 반영할 권리, 지도자가 될 권리를 추구하게 될 겁니다. 귀족으로 태어난 울리케가 신분에 종속되지 않는 사회를 떠올리게 될 과정이 궁금해집니다.
사실 개인적으로 처음 읽었을 때 즐거웠음에도 불구하고 까닭모를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뭔지 생각해보니 시대의 차이에 따른 괴리감이었습니다. 우리는 계몽의 시대를 지나 그 계몽이 오히려 신화가 되어 폭력으로 변질되는 것을 목격해왔지 않나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타자화하기 때문에 신이 죽으며 감정의 가치는 격하되는 시대, 그래서 도리어 거기에 거부감을 가졌기에 나타나는 현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몇 번 더 읽어보니 작가님이 이 지점을 많이 고민하시지 않았나 싶은 내용이 군데군데 보이기 시작했어요. 울리케가 자칫 계몽이 될까봐 주의하는 부분도 있었고, 고블린이나 류그라는 오히려 용과 동등하게 대할 수 있는 위계를 가지더군요. 가장 주목한 부분은 류그네라스의 힘이었습니다. 에다의 도리가 ‘깨달음’인 것과 달리 류그네라스의 힘은 공감에서 기원합니다. 지금까지의 스토리는 아직 이성에 집중되어 있지만 이성만을 다루지는 않을 것이라는 지표입니다. 실제로 가지를 다루는 시야프리테는 사람은 물론이고 동물에 이르기까지 그 삶을 염려합니다. 작중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는 인물 아닐까요?
나아가 개인적으로는 마법사 시그리드가 어떤 열쇠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습니다. 시그리드는 에다의 도리를 다루지만 동시에 신목의 힘도 받아들인 경험이 있죠. 그는 분명 에다의 이해와 류그네라스의 공감, 두 가지의 교차점에 선 인물입니다. 이성과 감성은 서로를 배격하지 않으며, 그 공존 가능성을 인정할 때 더 큰 시너지를 냅니다. 이 소설에서 그 사실은 어떤 식으로 작용하게 될까요?
오랜만에 정말로 재미있게 읽은 소설입니다. 이 소설이 가지는 함의를 떠나서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생생한 게 좋았고, 빨려들어가듯이 읽느라 잠이 부족할 정도로요. 무엇보다 이 복잡한 사건들을 하나의 얼개로 엮어서 다양한 시점에서 서술할 수 있다는 게 놀랍습니다. 궁금한 것도 많고 보고 싶은 것도 많네요. 이런 설렘을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는 게 짧아서 과도하기만 하고 허점 많은 글이 되었지만, 피어클리벤의 금화 출판을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