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에게만큼은 조금 쓴맛이 덜어지기를 바라며 <여전히 바닷물은 내게 너무 쓰다> 공모(감상)

대상작품: 여전히 바닷물은 내게 너무 쓰다 (작가: LubenEine, 작품정보)
리뷰어: 하얀소나기, 4시간 전, 조회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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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사리는 모래부터 바닷물까지 모두 마셔버리는 탐욕스러운 생물이오.’

(본문.8-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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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내 전부인 한 사람을 위해.

2.파괴. 욕망.

3.독자에게는 너무 쓴맛이 진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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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내 전부인 한 사람을 위해.

 

영화 <플래시>를 보셨나요? 흥행 자체에는 실패한 작품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장르적 재미 이상으로 주인공에게 복잡한 감정을 느낀 작품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죽은 엄마를 되살리고 살인죄를 뒤집어쓰고 있는 아빠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과거를 바꿨던 주인공이, 종국에는 모든 것을 잃어야하는 선택지에 고개를 끄덕여야만 하는 줄거리가 많은 울림을 주었죠. 그가 과거를 바꾸겠다는 거대한 일에 뛰어든 건 사소하면서도 절대적인 이유였습니다. 바로 제 가족이었죠.

 

이래저래 전 괜찮았는데 평가가 안 좋더라고요….

 

다소 로맨틱한 소제목을 제시했습니다만, 이 문구에 담긴 이미지가 많은 창작물에서 얼마나 큰 울림을 주었는지 공감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인간이기에 가치를 두는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재물과 권력으로 대표되는 물질적인 가치에 휘둘리는 것을 인간적인 본성이라고 표현되나, 그중에서도 같은 인간 혹은 인간에 준하는 존재에게 가치를 두고 지켜나가는 과정이야말로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는 인간의 본성에 부합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때문에 누군가에게는 수많은 타인 중 하나인 존재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제 삶의 모든 것을 움직이게 만드는 축으로 기능하기도 합니다. 그 결과가 비록 선한 영향력에서 거리가 있을지라도, 그것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무형의 가치가 바로 인간을 구성하는 원동력이라는 말도 되겠습니다.

 

이번에 읽은 <여전히 바닷물은 내게 너무 쓰다> 또한 이런 가치에 함몰된 주인공의 말로를 다루고 있습니다. 먼 미래, 온 나라가 바닷물에 잠기고 인간들이 해양생물로 변화해가는 세상을 배경으로, 더 이상 인간의 모습이라고 부를 수 없는 한 여인만 바라보며 무인도 같은 삶을 버티고 있는 화자의 이야기를 다소 난폭하고 해석이 동반되기 바라는 문체로 풀어나가는 것이 인상적인 소설이었습니다.

 

아래 내용은 문해력이 부족하고 이과적인 지식에 관심이 없는 독자의 주관적인 의견에 불과하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2.파괴. 욕망.

 

‘세상의 멸망’을 의미하는 아포칼립스(Apocalypse)를 다룬 장르들은 익숙한 무언가에 대한 파괴로 그 이미지가 재현됩니다. 내가 살아왔던 세상, 내가 의지했던 가족, 내가 좋아했더 연인 등……. 그 모든 것이 모종의 이유로 파괴되고 상실되는 것으로 나타나는 욕구들이 이 장르를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여전히 바닷물은 내게 너무 쓰다>에서도 파괴와 상실로 대표되는 이미지가 나타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이미지가 인물 하나를 뿌리로 두며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죠. 주인공은 그 인물을 ‘루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5-P42). 아 그래, 루시. 당연하지만 처음부터 이런 이름은 아니었다. 하늘에 맹세코 만약 저 이름을 우리의 첫 만남 때 들었다면 나는 이 성깔 더러운 간호사와 기를 쓰고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을 거다.

 

단편적으로 제공되는 정보들을 보면, 주인공은 ‘루시’라는 여인과 평범한 삶을 영유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멀쩡한 직업이 있고 생활이 있는 환경 속에서 만난 한 사람이었겠죠. 하지만 세상이 바닷물에 잠기고 ‘파괴’되는 것으로, 주인공이 기억하던 그녀의 모습 또한 철저히 ‘파괴’되어버립니다.

 

(1-P12). 루시는 휠체어에 묶여 있었는데, 그 순간 척추뼈가 120개가 넘는 생물처럼 허리를 갑자기 숙이더니 말릴 틈도 없이 그 자리에서 펄떡이는 고등어를 뜯어먹었다.

(5-P13). “그래, 플랑크톤. 이건 동물성 플랑크톤이잖소. 좀 크고 해마처럼 생기긴 했어도.”

(5-P22). “루시는 사람이야.” (중간생략)하지만 이젠 아니지.”

 

작중의 시점에서 ‘루시’의 모습 또한 세상의 여느 인간들처럼 본모습을 잃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타인의 시점에서 루시는 커다란 ‘플랑크톤’이나 다름없는 생물에 불과하며, 독자들에게 전달되는 묘사 또한 생리적으로 인간성이 남아 있지 않은 무언가에 가깝습니다.

 

주인공은 등대를 자신의 거점으로 삼고, 한때 인간이었던 연인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모습을 잃어가는 등대지기 노인을 돌보며 살고 있습니다. 이 작은 등대는 주인공의 마지막 세상입니다. 바닷물로 뒤덮이고 인간들이 해양생물로 변해버리는 지독한 세상에서, 이미 기억 속에 남은 세상을 그리며 생활을 견뎌냅니다.

 

(2-P47). ‘차라리 내일 세상이 끝장났으면 좋겠어.’ 싸우고 난 직후의 루시의 말버릇은 이 세상과 단 한 번 정확하게 겹쳐졌다. (중간생략)그때 나는 판단을 보류했지만, 두 가지 모두 겪어본 지금은 아무래도 서로 죽일 듯이 싸우는 게 더 낫다는 의견이다.

 

하지만 ‘루시’와 ‘노인’을 다루는 태도가 사뭇 다릅니다. 분명 주인공은 이 등대에 단 셋이 남은 좁은 세상을 굳게 지키고자하는 욕구가 엿보입니다. 이미 인간의 모습을 잃은 두 사람을 강압적인 방식으로 곁에 두며, 그들과의 추억을 회상하며 마음을 달래죠. 하지만 두 사람에 대한 시선에서 미련과 애정에 대한 차이가 분명히 느껴집니다.

 

(3-P19) 차라리 그들이 노인을 끌고 가서 자신들과 똑같은 생물체로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그러면 적어도 노인은 본능이 원하는 대로 바다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을 테니까.

 

자신의 실수로 노인을 잃었을 때, 그는 자책하고 분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를 떠나보내며 마음을 정리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줍니다. 단 셋으로 이뤄진 세상에 하나가 빠지는 공백이 얼마나 큰지 알면서도, 쓸쓸하고 담담하게 표현되는 마음이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반면에 ‘루시’를 대하는 태도는 노인과 결을 달리합니다.

 

(5-P20). “대체 왜 이걸 바다에 풀어주지 않는 거요? 바다에서 발발 헤엄쳐야 할 생물을 억지로 붙잡고 간신히 숨만 붙일 수 있게 하다니, 너무 저열한 짓이오.”

 

발췌한 대사는 주인공의 역린을 건드리는 장면으로 대표됩니다. ‘루시’는 단순히 그가 사랑했던 연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파괴되고 스러지는 세상과 구별되는, 오로지 자신만의 세상. 주인공이 지키고 싶고 되돌리고 싶은 것은 자신의 세상 그 자체입니다.

 

(5-P28).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이렇게 됐으면 당연히 이 상태에서 사람이 될 방도가 있어야 하는 거 아냐? 바다에 풀어줄 거라면 진즉에 풀어줬겠지! 그걸 몰라서 내가 여태껏 가만히 있는 줄 알아?”

 

즉, 주인공에게 ‘루시’는 노인처럼 실수로 놓쳐서도 안 되며, 미련으로 놓아버려서도 안 되는 존재로 대표됩니다. 주인공이 간절함과 울분에 차서 말하는 ‘다시 사람으로 되돌리고 싶어. 나처럼’이라는 말 또한 그런 의미로 해석됩니다.

 

(5-P21) “저열한 짓. 루시, 너를 다시 사람으로 되돌릴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는 게 저열한 짓이야?”

(5-P22) “루시는 사람이야.”

 

때문에 많은 것들이 파괴된 이 순간에도, 그는 루시가 ‘사람’이며 ‘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주장합니다. 그것이 단순한 현실도피이며, 믿기지 않는 현실에 대한 발버둥으로 비춰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주인공의 시선은 우직할 정도로 ‘루시’ 하나에게 집중됩니다. 마치 그가 바다가 보이는 풍경 이전의 삶을 전부 ‘루시’로 기억하는 것처럼 말이죠. 어쩌면 제게는 그가 그녀와 함께 사람으로 살았던 시대부터, 이미 주인공의 세상은 ‘루시’라는 등대에 갇혀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되기까지 합니다.

 

(6-P19). “당신은 내가 이대로 죽어버려도, 여전히 바다에 돌아가고 싶겠지.”

(6-P29). 나는 욕조 문을 닫고 나와 버린다. 문은 닫지만, 잠그지 않는다.

(6-P30). “바다로 가고 싶으면 가도 좋아.”

 

결국 주인공이 등대를 떠나던 순간에야 작은이별을 나누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자신의 세상 그 자체를 지키고 싶어 했던 헌신을 알아주지 못 하는 연인에게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바다로 가고 싶으면 가도 좋아’라는 말에 비해, 문을 닫아 바다로부터 그녀를 갈라놓으며 마지막 미련을 표출합니다. ‘문을 잠그지 않는다’는 서술로 주인공이 루시를 포기했다는 의미로도 읽히지만, 결국 현재의 루시가 어떤 상태인지를 고려하면 스스로 바다에 몸을 밀어 넣을 수 있을지조차 의문입니다. 이 순간에도 주인공은 말과 마음이 맞지 않는 거짓말을 했다는 추측도 가능하겠습니다.

 

저로서는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루시’가 멸망하는 세상을 대표하는 누군가를 넘어, 화자의 세계 그 자체를 인상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그것이 멸망해가는 세상 속에서 피어난 소회인지, 아니면 망가져가는 자신의 연인의 존재를 멸망으로 규정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겠습니다. 다만 자신의 세상을 부여잡던 욕망이 처참한 말로로 돌아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미 그의 세상은 바닷물에 잠기기 전부터 ‘파괴’되고 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3.독자에게는 너무 쓴맛이 진하지만.

 

이 작품은 여러모로 인상이 강렬한 편입니다. 멸망한 세상과 인간의 모습을 잃어가는 주민들을 그로테스크한 묘사로 표현하는가하면, 바다와 우주로 대표되는 거대한 이미지를 작중 핵심 주제로 가져옵니다. 그럼에도 ‘루시’에게 함몰된 주인공의 시선으로 이 모든 것들이 손 안에 담길 만큼 작게 포장된다는 인상을 주는 것도 작가님 본인의 역량을 추측하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이런 이미지들은 다소 직관적이지 못 하고 현학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장황하게 풀어내는 솜씨에서는 호불호가 갈리겠으나, 누군가에게는 명작으로 대표될 법한 고전의 문체를 따른다고 하면, 그 조차도 호평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그 많은 것들을 작가 고유의 테두리에 담아놓는 데에 성공했는가 하면, 선뜻 대답이 망설여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 작품에서 ‘고타마’라는 AI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많은 것이 손 밖으로 벗어나는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미래에서 온 해양생물들이 말을 하는 장면은 다소 유아적인 이미지로 다가오며 앞선 난폭한 이미지들과 이질감을 일으키는가 하면, ‘블랙홀’과 ‘빅뱅’으로 설명되는 난해한 설명들은 사실상 이미지가 될 수 없는 무언가를 두서없이 쏟아내는 느낌으로마저 비춰졌습니다.

 

말씀드리자면, 저는 작중에 설명되는 이 과정들이 과학적으로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특별히 고려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에 대해서도 큰 관심이 없는 편입니다. 다만 이런 우주현상을 직접 목격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여느 독자들에게 전하는 이야기치고는, 많은 근거들이 작가님 본인의 지식과 사고뿐이라는 데에서 아쉬움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만약 정말로 블랙홀이든 분자든 SF로 대표되는 지식들을 활용한 사건들에 휘말리는 주인공을 조명했다면 밑그림만 남은 상상이라도 시도하겠으나, 이 작품은 주인공을 주체적인 존재보다는 서술적 필요에 의해 선택과 배제를 반복하며 편리한 위치만을 선정하는 듯한 인상만을 주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작품 자체에서 다양한 이미지로 즐거웠다는 감상을 받을지언정, 이 재료들이 어떤 공통된 목적지로 향했다는 느낌은 적은 편입니다.

 

물론 작가님이 설정한 ‘루시’는 훌륭한 출발지이자 종착지로서 설계되어 있습니다. 영화 <플래시>에서 주인공의 ‘어머니’라는 인물로 많은 설득을 전하는 만큼, 이 작품 또한 ‘루시’라는 인물로 시선과 사고를 집중시키며 독자들을 끌어당기는 힘을 발휘합니다.

 

다만 체스말처럼 서술적 필요에 의해 움직이는 주인공의 특성을 고려하면, ‘루시’라는 인물을 축으로 돌아가는 주인공의 모습은 인상적인 한편 이따금씩 화자답지 않은 공허감에 당황스러운 면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은 주인공의 시선이 너무 ‘루시’ 한 사람에게 함몰되어 있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주인공은 결국 ‘루시’에 의해 시작되어 ‘루시’로 결말을 맺는 테두리를 맴돌고 있습니다. 인물 하나를 세상으로 두는 가치관 자체야 흥미롭지만, 그 밖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루시’에게 대입하자니 삐걱거리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만일 주인공의 회상이 ‘루시’를 구체화시킬 수 있었다면 이 대입이 자연스러울 여지가 있었겠으나, 독자로서 ‘루시’에게 남는 이미지보다, 주인공이 ‘루시’를 향해 울부짖는 이미지가 그를 앞서는 감이 있습니다. 때문에 소설을 다 읽었을 때, 주인공과 루시의 세상을 떠올리기보다는, 주인공이 ‘루시’를 향해 외쳤던 목소리 그 자체만이 남는 듯한 인상으로 다가왔습니다.

 

물론 이런 함몰되고 망가지는 인상이야말로 이 작품을 좋게 평가하는 독자들의 대부분의 의견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렇게 함몰된 목소리를 종착지로 제시함으로서, 결국 ‘주인공이 얻은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소설 <컨택트>는 ‘미래는 바꿀 수 없다’는 잔혹한 주제를 풀어낸 수작으로 평가됩니다. 저로서는 이 작품 자체도 친절하다고 여기진 않지만, 적어도 그렇게 ‘미래를 바꿀 수 없음에도 주인공은 무엇을 선택했는가?’에 대한 답에서 뼈저린 울림을 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반면에 이 작품의 주인공으로부터 얻은 울림에 대해서는, 작가님께서 선호하신 지식과 주제로 갈증을 채워보았다는 사변적인 언어로 풀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바닷물은 내게 너무 쓰다>는 마치 거대한 흉터를 째고 속살을 들여다보는 듯한 불온한 흥미를 자극하는 멋진 소설입니다. 호볼호가 갈린다는 관습적인 표현을 들먹이더라도, 결국 ‘호(好)’를 표하는 독자들을 고려하면, 제가 쓴 이 글 따위야말로 바닷물로 갈증을 채워보려던 무지한 독자의 헛소리로 치부됨이 당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멋진 작품을 선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명의 독자로서 공모전에서 좋은 결과 얻으시길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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