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저는 중단편과 호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걸 먼저 밝히고 부족한 리뷰를 남겨야겠습니다.
구독자가 많은 작품이라 해도 분량이 100화를 넘어가면 저도 모르게 주저하게 되는 데다가, 그런 작품들은 대부분 장르 또한 판타지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감명깊게 본 작품들도 있지만 아무래도 취향이 다르다보니 선뜻 손이 가지는 않더군요.
‘리치&돌’이라는 작품을 어떤 이유로 보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며칠이 걸릴 지 가늠이 안 되는 분량에 괜히 발을 들였나하고 망설였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리뷰를 쓰고 있군요.
일단 장르부터가 애매했습니다.
태그에 잔혹동화라 쓰여있길래 판타지의 형식을 빌린 호러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는데, 전혀 호러의 분위기는 아니더군요.
굳이 어딘가에 넣어야 한다면 정통판타지라고 해야 할 것 같지만, 내용은 아주 빡빡하게 가상의 국가들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연대기에 가까운 형식으로 담고있습니다.
‘빡빡하게’라는 단어가 조금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게,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이 작품에 대해 ‘진부한 설정의 나열’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다 싶어서 덧붙이자면 빡빡하다는 건 이 장대한 이야기의 진행이 어떤 한 사건에 대한 설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스트와 웨스트, 사우스와 노스, 그리고 미들왕국의 다섯개 국가의 역사와 정치, 경제가 톱니바퀴처럼 얽혀서 벌어지는, 그야말로 작가님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완벽한 세계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학창시절에 세계사를 좋아했는데, ‘고려시대에 아라비아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중국 송나라 때 유럽의 정세는 어떠했나?’ 하는 식의 비교역사가 재미있었거든요.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 엮인 노스와 사우스왕국.
‘관상용’으로 착취당하며 사우스인들의 노리개감이 되어버린 노스인들은 ‘인형’이라 불리우며 기본적인 인권을 무시당하고 살아오던 중, 사우스인의 타락과 부패에 실망한 귀족, 정복전쟁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외지인등의 도움으로 역사상 첫 저항운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저항운동은 실패로 끝나지만, 세상에 자신들의 존재와 사우스인들의 비인간적인 만행을 알리는 데 성공한 노스인들은 체제유지에 위기감을 느낀 사우스인들에게 더 심한 고초를 겪게 되고, 사우스를 탈출한 몇몇 노스인들인들은 조직적으로 사우스인들에게 대항하기 위한 힘을 모으게 됩니다.
노스왕국의 권력다툼에서 밀려나 사우스에 노예로 팔려갔던 베로니카가 구심점이 되어 노스인의 저항을 이끌고, 사우스왕국 안에서는 강력한 힘을 가진 제1귀족 엘리와 수가, 외부에서는 거대한 상단과 과학기술을 가진 이리가 이들을 도와 노스인들의 자유를 돕기위한 투쟁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전개하게 됩니다.
사실 여기까지의 간략한 줄거리를 보시면 일제시대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사와 놀랍게 닮아있는 이야기구조에 대체역사가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아직도 굳건히 연재되고 있는 이 장편소설의 뼈대는 그렇게 얇고 허술하지가 않습니다.
주요인물들 못지않게 주변인물들 또한 저마다의 성장배경과 자신만의 가치관, 행동의 이유등이 명확할 뿐 아니라, 비중이 적은 인물 하나도 결코 그냥 등장한 것이 아니라 적당한 시점에 나와 복잡한 이야기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 하고 내려가는 짜앰새를 보며 작가님의 치밀한 구상에 찬사를 보내게 됩니다.
2부로 가면서 이야기는 노스의 독립운동사에서 복잡하게 얽힌 다섯 왕국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로 발전하는 모양새입니다.
박진감있게 진행되던 노스인들의 투쟁사에서 다양한 왕국의 이야기와 노스, 사우스의 역사에 대한 탐색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면서 일관성이 떨어지고 이야기의 집중력이 분산되지 않을까하는 노파심도 있었지만, 현재까지의(2부73화까지의 연재분을 말합니다) 진행상황으로 봐서는 역시나 저의 노파심이었다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인정해야겠습니다.
‘리치&돌’은 긴 이야기이고 앞으로도 지금까지 분량보다 더 많은 글이 기다리고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부끄럽지만 글을 써본 사람으로서 이 글에 담긴 작가님의 고심과 자신이 창조한 세계에 대한 애정, 열정은 제가 감히 평가할 수 없는 깊이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휘몰아치듯 이어지는 다섯 왕국의 서사에서 작가님은 급하지도, 멈추어서지도 않고 격변의 역사를 반추해보는 늙은 사학자처럼 성실하게 새기듯 글을 쓰고 계시는데, 독자 입장에서 굉장한 신뢰감을 주는 부분입니다.
사무엘 존슨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더군요.
근면과 기술로 불가능한 것은 거의 없다. 위대한 작품은 힘이 아닌, 인내로 일궈진다.
작가님이 보여주는 열정과 인내는 독자들에게 전해져서 저와 같은 성질급한 독자들까지 글에 빠져들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수많은 사건과 인물들은 독자들의 상상력이 더해지면서 살아숨쉬기 시작합니다.
플루토와 엘리, 문고와 코레, 그리고 안나…
‘리치&돌’의 수많은 인물들이 제 머리속에서 깨어나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