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좀비, 그 또다른 변주 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이름 없는 몸 (작가: 천선란, 작품정보)
리뷰어: 이두영, 19년 7월, 조회 196

Log In. <곡성>이 던진 미끼

 

우리나라에 좀비를 소재로 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주목 받은 건 언제부터일까. 통시적/역사적 측면으로 접근하자면 각자마다 견해와 이유가 조금씩 다를 것이되, 좀비를 소재로한 창작물이 전면적인 주목은 아니더라도 2000년대부터 수요가 있었다는 점은 수긍하지 않을까 싶다. 중학생 시절 <새벽의 저주>를 보았다. 사실 그때만 해도 나는, “뱀파이어처럼 매혹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으어어 으어어’ 소리나 내면서 구부정하게 기웃거리는 시체들이 뭐가 좋다고 보는 건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터, <새벽의 저주>도 친구라는 것들이 보자고 해서 엉겁결에 보았다. 그리고 전력을 다해 질주하는 좀비들을 보고 한방 제대로 얻어 맞은 기분이었다. 이야… 이런 것도 있구나… 하면서.

그리고 그 이후에 좀비물이라고 할 것을 딱히 챙겨보거나 하진 않았다. 어느새 뛰어다니는 좀비의 모습도 비일비재 익숙해진 탓일까.

그러다가 감독 나홍진의 영화 <곡성>을 보았다.

 

 

호평과 악평이 갈리는 영화이지만, 적어도 나는 객석에서 2시간 30분 넘는 그 영화를 지루함 없이 몰입해서 보았다. 그러니까 적어도 나의 경우 이 영화가 최소한 ‘지루한 영화’는 아니었던 셈이다. 아니, 나름 재밌게 봤다고 말해야 더 솔직한 말이겠다. 내 지인 몇몇은 그닥, 이라고 평가했던 기억이 난다. 호평도 악평도 모두 수긍이 간다. 악평 중 기억나는 것은 故황현산 선생의 평가인데, 개인 트윗으로 올린 글이며 격월간 문예지 <Axt>에 실은 글이며 <곡성>에 대한 불쾌함을 드러내신 바 있다. 선생의 긴 이야기를 짧게 압축하면, ‘무력한 인간이 파멸하는 모습 구경거리로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에 불쾌감을 느꼈다, 라는 의견이었다.

황 선생의 견해는 잠시 미루고, 우선 다른 이야기를 하겠다. <나는 전설이다> 이래로 좀비를 소재로 한 스토리콘텐츠 대부분이 클리셰처럼 바이러스를 좀비 출현의 원인으로 동원하였다. <곡성>이 일련의 좀비 콘텐츠와 다르게 부각된 요소 중 하나는 바이러스 같은 것을 사태의 원인으로 삼지 않고 그 대신 초창기 좀비물에서나 볼 법한 신비주의적 요소를 핵심으로 삼았다는 부분, 이점이다. 서구권에서 <곡성>에 대한 호평이 많은 것은, 아무래도 서구 사회에 여전히 남아있을 동양에 대한 특유의 환상, 동양식 신비주의 등에 대한 매료가 작용했으리라 추측한다.

그리고 이러한 호감의 반응은 넷플릭스 <킹덤>에서도 똑같이 발견된다.

 

 

좀비라는 소재에 정치 스릴러가 결합된 <킹덤>은, 우리에겐 익숙한 조선시대 분위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서구인들에겐 낯설고 이국적인, 그렇지만 바로 그 낯설고 이국적인 모습 때문에 마치 판타지의 세계를 보는듯한 기분이 들어 매력적으로 어필된, 그런 작품이다. 게다가 스토리의 전개는 정치 스릴러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니, 서구권 시청자들이 <킹덤>을 보며 <왕좌의 게임>이 연상된다는 식의 반응을 보이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반응이겠지 싶다.

<곡성>이 던진 ‘신비주의 오컬트‘라는 미끼는 그렇게 <킹덤>에도 이어지면서 특히 해외의 관객/시청자들에게 호감을 주었다.

 

리뷰 대상작 <이름 없는 몸>은 외지인과 교류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이는 고립된 작은 마을 외면리를 배경으로 하여, <곡성>이 시골 동네라는 다소 고립된 느낌의 지역을 배경으로 삼은 것과 비교해서 살필 수 있어보인다. 또한 오컬트 호러를 보는 듯한 느낌도 같은 요소로 논할 수 있을 듯하다.

허나 그것이 전부였다면, 내가 <이름 없는 몸>을 두고 리뷰를 작성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게다.


Key Word. 흥행작을 관통하는 키워드 두 가지

 

 

한국 좀비 영화로 흥행한 작품 중 <부산행>을 빼놓을 수 없으리라. 같은 영화로서 <곡성>과 비교하자면, <부산행>은 신비주의 오컬트 판타지를 끌어들이지 않았으며, 그 대신 좀비를 소재로 한 스토리콘텐츠가 선보인 다양한 클리셰들을 적절히 활용하여 흥행한 케이스이다.

그렇다면 <킹덤>은 신비주의라는 요소로 <곡성>과 연결되는 공통점이 있는 반면 <부산행>은 <곡성>과 좀비라는 소재 말고는 공통점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 대답은, <곡성>과 <부산행> 또한 연결고리가 있으며, 그 연결고리는 바로 ‘아버지’이다. <곡성>에는 곽도원이 있고, <부산행>에는 공유가 있다. 내 딸을 지키려고 사력을 다하는 가부장이 있다.

특히 감독 나홍진의 전작 <추격자>에서도 가부장이라는 요소는 매우 크게 작용했다. 작중 김윤석은 혈연관계만 아닐 뿐 엄마가 실종된 어린 여아를 위해 직접 사건에 뛰어든다. 이점에서 작중 김윤석은 유사 부녀관계를 형성한 셈이며, 따라서 <추격자>는 ‘아이를 위해 사라진 엄마를 찾고자 직접 나선 가부장 아버지’의 서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가부장의 시도는 실패한다. 공교롭게도 이 패턴은 <곡성>에도 여지없이 적용된다. 김윤석이 실패하듯, 곽도원도 실패한다. 감독 나홍진이 보여준 두 흥행작의 공통점, 그것은 ‘몰락하는 가부장’ 서사라는 점이다.

 

 

이상을 정리하면, 흥행한/호평받은 좀비 소재 콘텐츠 세 작품은 1. 동양에 대한 신비주의가 개입되었거나 2. 아버지 즉 가부장의 모습이 부각되었다. 흥행작을 관통하는 키워드 두 가지—그것은 하나는 (특히 서구권 시청자들에게 신비롭게 보이는 그들 특유의 편견에 기반한) 오리엔탈리즘이요 또 하나는 아버지라는 가부장, 이렇게 두가지였던 셈이다.

그리고 리뷰작 <이름 없는 몸>은 그 두 가지를 벗어나는 작품이다.


Log Out. 한국의 좀비, 그 또다른 변주

 

<이름 없는 몸>은 외면리라는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정체불명의 으스스한 공기를 자아낸다. 마치 <곡성>이 오컬트 판타지로 어필했던 것과 유사해보인다. 그러나 <이름 없는 몸>의 경우, SF/호러 장르로 등록되어 있다. 아닌게 아니라 10회차에 접어든 현재, 이 작품은 오컬트적인 요소만 활용하는 게 아니라 그 이상의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는 듯한 암시를 풍기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름 없는 몸>은 <곡성>이나 <킹덤>이 보여준 동양적 신비주의에서 한 걸음 빗겨 서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작중 주요 인물들은 모두 저마다 입장과 상황, 행동의 양태를 달리하는—서로 다른 여성 주체들이다. 이 작품에 딸이나 아내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희생을 감수하거나 혹은 그들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쳤지만 무기력하게 패배하는 ‘불쌍하신’ 가부장은 보이지 않는다. 즉 <곡성>과 <부산행>이 공유하는 연결고리, 가부장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이 작품은 한 걸음 빗겨 서있다.

이렇게 쓰면서 생각해보니, 황 선생이 <곡성>을 두고 불쾌감을 드러낸 견해는, 아마도 황 선생 본인께서 누군가의 남편이고 누군가의 아버지인 ‘가부장’이기에, 곽도원에게 감정이입을 강하게 한 탓이 아닌가 싶다.

실패와 몰락의 서사이든 성공과 극복의 서사이든 가부장의 서사는 역사가 진행된 이래 셀 수 없이 많다. 좀비를 소재로 흥행한 두 영화가 가부장을 공통 키워드로 품고 있다는 사실은, 그래서, 크게 놀랍지도 않을 정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름 없는 몸>에 가부장이 없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있다. 또한 한국의 흥행 좀비 콘텐츠가 기존의 좀비 콘텐츠와의 차별점으로 오컬트적 요소를 상당히 활용 중이라는 점에서, <이름 없는 몸> 또한 오컬트적 분위기를 풍기고 있으나 또 다른 이면의 요소가 작동하고 있다는 암시를 풍기고 있으니, 아무래도 요즘 흥행작들의 유행과는 차별화된 지점이 나타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한국의 좀비, 그 또다른 변주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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