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이 작품을 읽고 느낀 것은 이 리뷰의 제목으로 요약됩니다. 피해자라고 해서 무고하기만 하지 않고 피해자와 가해자는 언제나 뒤바뀔 수 있다. 개인으로서 가해-피해 구도가 명백한 사건이 사회적으로는 반대가 될 수도 있다.
그 점을 고찰하려는 작품이었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윤신재는 어디까지나 피해자입니다. 현실에서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는, 학교와 사회 시스템의 한계 때문에 교사의 악의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버린 가엾은 학생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소수자이기도 합니다. 미성년자고 학생이라 교사의 가혹행위에 취약한 위치에 놓여있었죠. 그 학생이 정말 퀴어라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으나 교사 강숙여가 한 공격은 청소년 퀴어 의제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니 윤신재가 유일한 자기 편이라 여겼을 화자에게 자신의 울분을 쏟아놓은 퀴어 소설을 내밀며 교사들 욕을 하는 부분은 처절하고 안타까운 장면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전 작품 제목을 처음 봤을 때처럼, 브릿지의 신고 항목에 욕설과 지나친 비속어가 있다는 게 먼저 떠올랐습니다.
그렇다고 정말 신고하지는 않았습니다. 장면 묘사를 위해 필요한 수준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뭣보다 그 장면의 문제점이 그것만이 아닙니다.
저는 작품의 등장인물이 퀴어를 비롯한 소수자로 등장하는 데 굳이 이유가 필요 없다는 걸 알지만, 이 작품에서는 다소 곤란한 면이 있습니다. 마치 소수자로서 혐오와 차별을 겪었기 때문에 그 가해자가 여성인 걸 빌미로 여성혐오를 해도 된다는 알리바이를 제공하려는 것 같잖아요?
악한 여성 캐릭터를 징벌하는 방식으로 강간 살해를 택하는 것, 현실에서 자신에게 나쁘게 대한(범죄를 저지르거나, 속이거나, 무례하게 굴거나 혹은 구애를 거절한) 여성을 자기가 쓴 픽션에 등장시켜 입맛대로 해체하고, 개조하고, 징벌하는 일은 서사 장르의 시초부터 현재까지 죽 이어져왔습니다. 현재진행형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 사골 중의 사골을 다시 우리는 것이 강숙여에게 적합한 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군요. 윤신재가 정말 남성 동성애자 퀴어라면 강간이 성욕의 문제가 아닌 남성 권력에 의한 여성 학대 문제라는 증명밖에 되지 않아요. 만약 강숙여, 최한빛이 남성 교사였다면 과연 그 소설에 동성 성폭력 장면이 나왔을지 의심스럽습니다.
그 결과 처절하게 고통받은 피해자가 있음에도, 그 피해자가 원망하는 대상은 흐려집니다. 추한 교권과 그걸 자정하지 못하는 교육계의 무능함인지, 두 나쁜 여성인지, 그럼 그 둘만 간살당하면 윤신재는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인지.
가장 안타까운 것은, 작품 속 소년 윤신재는 아직 고등학생으로 살아남는다면 앞으로 충분히 성장하고 개선될 여지가 남아있지만, 이 작품의 저자는 이미 최소 서른일곱 편(브릿지에 공개된 작품들 숫자 기준입니다.)을 썼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