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사기노 게이고의 <편지>를 또 그 옆에는 <SF는 인류 종말에 반대합니다>를 옆에 끼고서 정작 제가 읽고 있는 소설은 브릿지 종합 베스트 1위 <피어클리벤의 금화>입니다. 다른 책을 읽다가 집중이 안되서 넷소설을 잠깐! 아주 조금만!! 읽어보려 했던 건데 이럴수가. 정말이지 재미나서 주말 내 읽으리라 다짐했던 종이책은 못읽고 피어클리벤의 금화만 잠못들며 넘겼네요. 200자 원고지 7,012매의 분량이라 제 속도로는 결코 하루나절로 끝낼 수가 없더라구요. 하기야 2017년부터 연재된 소설을 하룻밤에 아작내면 그도 서운할 일이긴 합니다만.
소설은 린트부름의 올바른 적생자 “용” 빌러디저드가 소녀 울리케를 사로잡으며 시작합니다. 사악한 용이 공주를 사로잡는 이야기야 고대로부터 흔하지만 이번 사례엔 좀 남다른 점이 있어요. 목적이 공주의 감금에 있지 않고 용의 포식에 있거든요. 17세, 피어클리벤 영지의 여덟번째 자식이며, 키보드 워리어였다면 365일 전투일지에 승전보를 썼을, 용감무쌍하지만 높은 곳을 무서워하고, 용의 거대한 식사를 담당할만큼 요리하기를 즐기며, 종을 가리지 않고 대화하고, 책이라면 환장을 하는 울리케는 오늘 점심엔 그저 한 마리 먹이감일 뿐입니다. 용의 고요한 식탁 위 정찬의 일부랄까요. 적절한 음식의 재료 같지 않다는 건 인간인 우리 생각일 뿐, 용에겐 인간구이나 참새구이나 별반 차이가 없겠죠. 용의 영지에 존재하는 게 말라비틀어진 순무나 씹는 맛도 별로인 말린 대구 정도일 뿐일 때는 더더욱이요. 바들바들 떨며 용을 설득할 방법을 궁리하던 울리케는 그때만 해도 정말 몰랐을 거에요. 용의 “먹겠다”는 말이 제 운명의 포문을 열었고 용의 “먹지 않겠다”는 말로써 영지 피어클리벤이 바람 앞의 등불이 되었다는 사실을요. 피어클리벤의 안녕을 위해 한낱 영주의 여덟번째 자식이었을 뿐인 울리케가 사방팔방으로 달리고 날아가고 영혼까지 분리되는 모험에 몸을 던져야만 하는 상황에 처합니다. 자유의지는 아니었으나 용의 무자비한 가치 앞에 울리케가 무슨 힘이 있겠나요. 거기다 독자인 제 입장에선 울리케의 고난이 깊고 거대할수록 새록새록한 재미가 쌓일 따름이니 연재 차수를 넘길 때마다 입을 떠억 벌리며 울리케 힘내라!! 고 응원만 한가득 날릴 뿐입니다 ㅎㅎㅎ
용과 계약했던 초대황제로부터 시작한 제국. 그러나 어느 덧 용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 귀족과 마법사들이 힘을 잡게 된 세상. 개성 강한 피어클리벤 영지의 가족들과 지혜롭고 용맹한 고블린 전사, 괴짜 마법사와 모험가 무리, 얼음여왕 같은 서리심 리뉴르, 집시처럼 세상을 떠돌며 탄압받은 류그라들, 공작영지의 반룡 아이비레인, 울리케의 영혼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게 된 까마귀 그림니르, 그림니르의 주인이자 울리케의 가신이며 울리케에겐 짜증을 독자에겐 설렘을 선사하는 크누드. 이들의 얘기로 밤새 수다떨고 싶지만 그럼 스포를 너무 날리게 될테니 이만 리뷰를 마무리 하려 합니다. 90년대 읽던 옛 판타지 소설의 정취를 느끼게 하고 주말이나 휴일을 한숨처럼 눈깜짝할 새 날리게 만들 글입니다. 여태 읽지 않은 분들이 계시다면 5월에는 꼭 만나보시기를 추천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