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을 읽으며 자연스레 아담과 이브, 금단의 열매, 뱀, 그리고 구원자라는 이미지들이 떠올랐다. 아마도 주인공에게 사과를 팔던 노파가 덤으로 건넨 신기한 과일, 그리고 그 과일이 불러온 수상할 만큼 황홀한 맛 때문일 것이다.
그는 지금껏 한 번도 맛보지 못한 경이로움을 느끼고, 그 맛의 비밀을 알고자 씨앗을 싹틔워 나무를 키운다. 그러나 그 나무는 세상 어디에도 등록되지 않은, ‘검역 불가’한 종이었다. 어쩌면 인간의 세계가 감당하지 못하는 금단의 생명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그는 한국행을 포기한다. 이름조차 불분명한 그 나무를 두고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나무는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자신이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감정이자 욕망,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탐닉의 흔적이었다.
“불행한 것아.
너는 나로 인해 기뻐하고, 나로 인해 불행하여라.”
나무가 그를 옥죄며 속삭이는 말은, 마치 금단의 열매를 먹고 선악을 깨달은 인간에게 내려지는 신의 저주처럼 들린다. 그는 나무(욕망)로 인해 기뻐하고, 동시에 그 나무로 인해 불행해진다. 그를 옭아매고 삼켜버릴 듯한 나무의 모습은 인간의 탐욕과 구원, 쾌락과 죄의식이 한몸으로 얽힌 상태를 상징하는 것같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완전히 잠식당한 순간에 오히려 원영을 떠올린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에게 원영은 자신이 미처 깨닫지 못했던 구원자로서 다가온다.
마지막에 원영이 그의 집 문을 두드리는 장면은 그가 완전히 나무에 먹히기 직전, ‘욕망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통로’처럼 보인다.
원영은 금단의 열매에 사로잡혀 허우적대는 그를 현실로 이끄는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흥미로운 반전은 그 직후 등장한다. 원영 역시 노파에게서 그가 샀던 같은 과일을 들고 와, 그 과일을 꺼내 보이며 “요즘 한국에서도 많이 먹는다”고 말한다. 그 순간,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한 번 금단의 맛을 본 자는 결코 다시 그 맛을 모를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많이 먹는다며 과일에 대해 그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원영의 말이 더욱 섬뜩하게 들린다. 이제 그 금단의 과일은 낯선 열매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손쉽게 사서 먹는 익숙한 현실의 맛이 되어버렸다.
요즘처럼 황금만능주의와 쾌락주의, 욕망을 부추기는 시대를 떠올리면 노파의 “맛이나 보시게”라는 말이 기이할 만큼 현실적으로 들린다. 혹시라도 어느 스산한 골목 어귀에서, 그 비슷한 노파가 슬그머니 다가와 수상한 과일 하나를 덤으로 내민다면 나는 절대 받지 않을 것이다. 공짜라면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