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사람은 역시 집에서 출근 준비하다가 모르는 사람이 집 안에서 나타나도 침착하군요. 저라면 놀라서 양치 거품을 꿀꺽 삼키는 수준이 아니라 비명도 못 지르고 굳어버리거나 바로 집 밖으로 도망칠 것 같은데요…. 한때의 영광이라고 해도 우수잠수사 표창까지 받은 사람이라설까요? 이 정도는 되어야 자기 목숨을 걸고 다른 사람을 구할 수 있구나 싶었습니다. 단지 물의 집합체일 뿐인 웅덩이가 사람을 죽이는 촉수들이 사는 ‘알 수 없는 바다’라는 곳과 이어진 세상에서도요.
소설을 비롯한 여타 창작물을 볼 때 가장 큰 즐거움은, 읽는 제가 살 수 없는 곳에서 제가 모를 사람들이 느끼는 걸 간접 체험할 수 있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무척 안전하게요! 알 수 없는 바다에서 온 게 사람 모양이 되었다고, 그걸 박박 씻기고 나니 지독했던 바다 냄새도 사라졌다고 하마터면 사람을 죽일 뻔했다며 식은땀 흘리는 특수잠수사를 제가 이 작품이 아니면 어디서 알고 얘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목소리를 대가로 준 인어처럼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촉수들이 나와 사람을 잡아가는 깊디깊은 바닷속 같은 검은 눈동자의 청년은 또 어떻고요?
해랑이 단지 재능이 있기 때문에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특수잠수를 기쁨도 보람도 없이 의무감으로 하는 것도 굉장한데, 존재할 리 없는 인어에 홀려 아버지가 실종되었단 얘기를 알고 나니 해랑도 인어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사람이 명절이 되면 아무리 차가 밀리고 시간이 오래 걸려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알 수 없는 바다에 가기 위해 특수잠수사가 됐고 어떻게 봐도 수상하고 위험한 영하를 거둔 거죠. 작품 시작 때 왕년 얘기가 나왔을 정도면 어느 정도 경력이 있을 텐데 이러고도 현역으로 일하다 33년 뒤에 마지막 잠수를 간다는 게 저한테는 영하의 정체만큼이나 오싹했답니다….
혼자 살아온 날보다 더 오래 같이 지낸 날이 너무 짧게 나와서 아쉬웠지만, 덕분에 쓸쓸함을 덜 느낀 채로 심도 9.9 아래로 내려갈 수 있어서 제 여린 마음에는 오히려 다행이었던 것도 같습니다. 그동안 떨쳐내기 바빴던 아버지의 말을 본인이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떠나보내고, 또 그리워했을까요? 새까만 바닷속에서 은하처럼 빛났을 재회의 장면이 유달리 더 아름다워 보인 데에는 그런 밤이 있었기 때문이겠죠.
그러니 이 재회에 정체가 뭐가 중요할까요? 그간 서로 죽이고 상처입혔음에도 마주 안을 수 있다는 게 제게는 희망처럼도 보였습니다. 어쩌면 나중에는, 옛날 어린이처럼 미래의 어린이도 웅덩이에서 촉수와 놀지도 모른다는 희망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