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은 가정폭력이라는 소재에 시간 여행을 오버랩 시킨 판타지 스릴러 작품입니다. 시간 여행을 통해 가정사를 바꾸려는 노력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시간여행의 영원한 명작 ‘백투더퓨쳐’와 비슷한 색깔이 보입니다. 그러나 분위기는 그보다 훨씬 무겁기 때문에 그 질감은 비교도 안 되게 거칠게 느껴집니다. 비유하자면, 사소한 선택에서 오는 인과관계를 다룬 스릴러 영화 ‘나비효과’와 비슷한 질감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인과관계는 그보다 더욱 복합적으로 얽혀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시간여행’이라는 소재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부분 -인과의 시간적인 역전으로 인한 복선 해소에서 오는 지적 쾌감 등- 이 알차게 들어가 있습니다.
이 작품에는 두 명의 1인칭 화자가 번갈아 등장합니다. 홀수 장은 가정 폭력의 피해자로 살해당한 어머니를 위해 아버지를 구하려는 아들의 이야기로, 짝수 장은 스토커에게 시달리는 젊은 여성의 이야기로 전개됩니다. 한 치의 앞도 예측하기 어려운 양쪽 이야기의 긴박감도 뛰어나지만, 두 이야기가 어떻게 서로 엮이면서 마무리될까에 대한 기대감까지 더해져 작품에서 눈을 뗄 수가 없게 됩니다.
홀수 장의 화자는 길지 않은 문장으로 짧고 투박하게 이야기합니다. 가정 폭력이라는 어두운 그늘 속에서 자라온 화자의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그는 어머니를 죽인 과도로 아버지를 죽이고, 곧이어 자신의 목숨도 끊습니다. 그리고 세 번의 기회를 주겠다는 악마의 속삭임을 듣게 됩니다. 그는 시간을 되돌려, 어머니를 해치려는 아버지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짝수 장의 화자는 여성의 느낌이 살아나는, 비교적 긴 문장을 구사합니다. 스토커에게 쫓기던 그녀는 운명처럼 한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그러자 스토커는 타겟을 남자로 바꾸고 그를 공격합니다. 절망과 분노에 찬 여성에게도 세 번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녀는 스토커로부터 남자를 살리기 위해 선택을 합니다.
다른 리뷰어 분들을 본받아 최대한 스포일러를 피하려고 하였으나, 곧 이 작품의 멋진 요소를 스포일러 없이 리뷰하는 것은 제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스포일러 경고선을 남깁니다.
—이하 내용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니, 반드시 작품을 감상하고 나서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시간 여행만 아니었다면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았을지도 모르는 (물론 서로 이어지지도 않았을지도 모릅니다만) 세 가족은 서로 죽고 죽이는 관계로 얽혀버립니다.
영희는 남편 찬석을 구하기 위해, 그를 해치려던 아들 세호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찬석은 술에 취해서, 아내인 영희를 죽였습니다. 세호는 그렇게 죽은 어머니 영희의 복수를 위해 아버지 찬석을 죽이게 됩니다. 지옥이 따로 없는 광경입니다.
어머니를 위해 행동한 결과 세호는 자라면서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젊었을 시절의 어머니를 괴롭힌 스토커의 얼굴을 한 자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호는 그것을 아버지의 탓으로 여기면서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키워갔고, 결국 아버지를 향해 과도를 휘두를 수 있는 패륜아로 성장합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해석에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 같긴 한데, 영희가 사람을 살해하는 것을 보게 된 남편 찬석의 무의식에는 범죄자로서의 영희가 각인되는 것 같습니다. 이는 찬석이 시장에서 영희를 죽이는 아래 묘사에서 다음과 같이 암시됩니다.
…그때까지도 그는 모든 게 사회 탓이라고, 자신을 망하게 한 사회는 범죄자고, 저 년도 자신을 망하게 했으니 같은 범죄자 아니겠냐고. 귀가 먹었냐고. 저 년은 범죄자라고, 범죄자를 죽인 게 무슨 죄냐는 말도 안되는 악을 썼다.
물론 작품 내에 찬석의 속내가 직접적으로 묘사되는 부분도 없고 다른 두 사람과 달리 시간 여행의 기회가 주어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가 아내를 죽인 것은 시간 여행의 여파가 아니라 그냥 그가 쓰레기였기 때문이라고 해석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의 아내 영희의 생각대로, 찬석이 그렇게 된 주된 이유가 “아버지가 힘들게 이룬 것을 너무 쉽게 물려받고, 그것이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그 결과 그의 ‘좋은 부분’이 사라졌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영희가 기억하는 스토커의 얼굴을, 그와 육탄전까지 벌인 찬석이 몰랐을지는 의문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자식의 얼굴에서 끔찍한 악몽을 떠올려야 했던 것이 단지 영희 뿐이었던 것은 아니지 않았을까 합니다. 게다가 사랑하는 여인이 사람을 죽이는 모습을 보았다면… 음… 저는 세호의 시간여행이 찬석에게도 영향을 미쳤다는 쪽에 한 표 던지겠습니다. (다른 독자분들의 의견도 궁금하네요.)
작품에서의 시간 이동은 과거를 덮어버리는 (오버랩) 효과를 가져옵니다. 세호와 영희가 각각 세 번의 기회를 쓰면서 그렇게도 바꾸고 싶어하던 세상은, 결국 돌고 돈 끝에 첫 장면으로 되돌아갑니다. 세호가 이미 세 번의 기회를 썼으니, 그냥 찬석을 죽이고 자기도 자살하는 것으로 비극이 마무리될까요? 하지만 그건 작품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일 뿐, 이 시점의 세호는 아직 악마를 만나 세 번의 기회를 얻기 전입니다. 그러니 이 끔찍한 존속 살해의 수레바퀴는, 아마도 영원히 끝나지 않고 서로 꼬리를 물면서 오버랩되지 않을까 합니다. 찬석과 세호와 영희의 나이프가, 끝없이 서로의 목을 노리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