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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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버그라고 하니 생각난 것인데, 가끔 버그 개선 공지를 꼼꼼이 읽어보면 이런 버그가 있다고? 싶은 버그가 있다.
이를테면 샤나인코더 4.8 버전에서 개선된 사항 중 이런 것이 있다.
<컴퓨터가 24.9일 동안 켜져 있으면 ShanaFFplay에서 fps 출력이 안 되는 문제 수정>
이 작품의 점프 버그와 비슷한 느낌이 든다. 대체 누가 65,536번의 점프를 하고, 또 누가 24.9일 동안 컴퓨터를 켜놓는단 말인가? 하지만 어쨌든 저런 버그는 발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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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536을 생각해보자. 작중에서는 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는 숫자로 나온다.
단순히 65536이라 쓰지 않고 65,536이라 쓴 점이 눈에 밟혔다. 65와 536을 따로 생각해보라는 뜻일까? 그러고 보니 주인공은 주 65시간을 일했었다. 그리고 작중에서 주인공은 65시간을 이렇게 표현한다. ‘나는 정말로 농노처럼 일했다. 아니, 농노들한텐 미안하지만 내가 더 열심히 일했던 것 같기도 하다. 일주일에 한 65시간에서 70시간 정도 일했었나’, ’65시간 일하면서 채팅 서버를 구현하던 나는’, ’65시간의 트라우마가 엄습해서 처음에는 게임 쪽은 알아보지도 않으려고 했다.’, ‘주 65시간의 끝없는 노동을 끼얹으면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이야 어려운 일이 아니다.’
즉 여기서 65시간은 ‘한계’를 뜻한다. 한계까지 계속 몰아붙이면 정신이 이상해진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럼 뒤의 536은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해 다루는 건, 아쉽지만 잠시 뒤로 미뤄둬야 한다.
이에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다뤄야 할 부분은, 이 작품에서 주인공이 만드는 것은 ‘게임’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말을 빌리자면, 작중에서 게임은 ‘세계’이다.
세계를 만든다. 바로 ‘창세기’다.
우리는 성경을 들여다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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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536란 숫자를 창세기에서 찾을 수 있을까? 아쉽게도 65,536 그대로로는 나도 찾을 수 없었다. 65와 536으로 나눠 생각해도 창세기는 50장까지 밖에 없기 때문에, 창세기 65장 536절 같은 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잠시 발상을 전환해봤다. 65,536을 65와 536으로 나눠서 생각했듯, 숫자 자체를 좀 더 작게 줄일 수 없을까?
그러자 답이 보였다.
65,536을 소인수분해하면 이런 값을 구할 수 있다.
2의 16승.
4의 8승.
16의 4승.
<창세기 2장 16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창세기 4장 8절. 카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카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둘 다 의미심장하지만, 내가 주목한 것은 16의 4승이다.
<창세기 16장 4절.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이것만 보면 왜 의미심장하다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성경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짐작할 수도 있다. 16장 4절에서 하갈이 임신을 하는데, 훗날 낳게 된 그 아이의 이름은 ‘이스마엘’이다.
이스마엘. 영문학을 공부하거나, 관심을 가진 사람에게는 가장 유명한 소설 속 등장인물 아닐까?
Call me Ishmael. 바로 허먼 멜빌이 쓴 ‘모비 딕(Moby Dick)’의 화자다.
모비 딕은 ‘모비 딕’에 등장하는 흰 고래의 이름이다. 그리고 흰 고래, 즉 백경(白鯨)의 鯨자는 ‘고래 경(鯨)’자로, 鯨을 잘 뜯어보면 魚(물고기 어)자와 京(서울 경)자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鯨(고래 경)자는 䲔(고래 경)자와 이형동의자로, 부수인 畺는 ‘끝, 한계’라는 뜻을 지닌다. 이는 앞서 ’65시간’의 의미와 겹치게 된다.
이쯤에서 독자들은 의문을 느낄 수도 있다. 畺의 한계라는 뜻은 맞다 쳐도, 京(서울 경)자는 내가 왜 언급했는가 하고 말이다.
만약 의문을 느낀다면, 슬슬 숨겨두었던 패를 꺼낼 때가 됐다.
이 작품의 주 소재가 게임이라는 점을 염두해 두고, 65,536을 기계의 언어인 ‘이진법’으로 풀어보자.
쉽게 이진법 계산기를 이용해 돌렸다.
결론은 이렇게 나왔다.
65,536
=10,000,000,000,000,000이다.
즉 1경.
10,000,000,000,000,000은 1京(경)이다.
즉 65,536자체가 ‘끝이나 한계’를 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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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미 할 얘기는 다 끝났다. 하지만 앞서 ‘536은 무엇인가?’에 대해 떡밥을 던졌기 때문에, 그에 대해 풀어본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작품은 주인공의 이름조차 교묘하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송현희’. 송현희의 ‘현희’가 무슨 한자를 쓰는 지는 모른다. 아니, 알 수 없다.
하지만 성(姓)인 ‘송’은 짐작할 수 있다. 宋(송나라 송)일 것이다. 송나라의 건국 연도는 960년. 소인수분해하면 2의 6승X3X5로, 2를 제외하고 숫자의 순서를 바꾸면 536이 갖춰진다. 송현희 자체가 536이다.
작가의 교묘함은 이 지점에서 더욱 지혜를 발한다. 536만 송현희이고 65는 내버려두었는가? 아니다. 65는 6과 5로 나눠볼 수 있다. 그리고 6과 5를 더해서 나오는 숫자는 11.
다시 창세기를 펴보자. 창세기 11장은 바로 바벨탑에 관한 이야기다. 오로지 언어는 하나 뿐이던 시절, 바벨탑의 붕괴와 함께 사람들의 언어가 나뉘고 소통이 단절됐다는 이야기. 이것은 주인공이 행하던 일이 ‘채팅 서버를 구현’하는 것이라는 점과 묘하게 이어진다. 게다가 결국 게임이 터졌듯 바벨탑도 무너졌으니, 운명마저 비슷하다. 이렇듯 65,536은 모두 송현희에게 속해있다. 65536이라 쓰지 않고 중간에 ,을 찍은 이유가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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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외로 하나 더 생각해봤다.
“왜긴요, 세상이 터지게 생겼으니까요. 제가 이 짓 하기 전까지는 메모리 점유율이 95%였어요. 좀만 더 하면 용량 초과되고 세상이 그냥 끝나게 생겼어요.”
윤수현의 말이다. 작품을 읽으면서, 나는 ‘95%’에도 뭔가 의미가 있지 않을까 의문이 들었다.
짐작한 사람도 있겠지만, 멸망과 %를 같이 염두에 두니 어렵지 않게 ‘지구종말시계(The Doomsday Clock)’가 떠올랐다.
<지구종말의 날 시계(doomsday clock)는 핵 전쟁 위기를 경고하기 위해 미국 시카고 대학 핵물리학자회를 중심으로 아인슈타인 등 원자폭탄 개발프로젝트 「맨해튼 계획」의 주요 과학자들이 참여해 만들었다. -네이버 시사상식사전->
단순히 24시간의 95%면 ’22시 48분’이지만, 이 시계는 만들어진 이후로 단 한 번도 23시 밑으로 내려간 적 없으니 분 단위로 계산해보자.
60분의 95%는 57분이다.
이 시계가 역사상 23시 57분을 가리켰던 때를 찾아보았다. 지구종말시계가 23시 57분을 가리켰을 때는
‘1949년’에 소련이 핵실험을 했을 때.
‘1984년’에 미국과 소련 간에 군비경쟁이 심화됐을 때
가 있다.
작가는 냉전의 위험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다소 뜬금없는 주제인 냉전 대신 작품과 좀 더 연관된 테마를 생각해보기로 했다.
작품 속 인물인 윤수현은 말한다. ‘이 세상은 시뮬레이션이다.’
그에 따라 ‘매트릭스’가 언급되기도 한다.
매트릭스, 즉 디스토피아.
그리고 간과할 수 없는 윤수현의 ‘아, 그러실 필요 없는게, 어떤 생각 하시는지 제가 바로바로 알 수 있는…’라는 대사.
다른 걸 떠올린 사람이 있을까? 디스토피아 문학의 대표작, 조지 오웰의 ‘1984’다. 1984가 의미하는 것은 ‘1984년’으로, 책이 쓰여질 당시에는 가상의 미래였지만 실제 역사에선 1984년은 지구종말시계가 57분을 가리킨 연도다.
1984년은 해결됐다. 1949년은 무엇인가?
어렵게 생각할 것 없었다. 1984년보다 먼저 지구종말시계가 57분을 가리켰던 1949년은, 바로 조지 오웰의 1984가 출간된 연도다.
이것을 단서로 생각해보면, 작가가 경고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작중의 세계가 ‘사람이 하는 생각과 행동이 모두 기록되고 감시받게 될 수 있는 디스토피아’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