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뷰하기에 앞서, 화자의 정체성이 고양이 혹은 사람으로 뒤바뀌는 등 이야기를 이해하기가 매우 난해했음을 밝힙니다. 다양한 인물들의 관점으로 주인공 문영의 모습이 묘사됩니다. 이야기의 화자는 직장동료인 지훈, 고양이 여자, (아마도 문영의 전애인. 은영으로 추정됨), 3인칭 관찰자, 문영의 사연, 은영, 3인칭 관찰자, 3인칭 관찰자 순으로 이어집니다.
글의 도입부는 최문영을 바라보는 직장동료 지훈의 시선으로 시작됩니다. 문영은 지훈과 같은 학교 같은 전공 같은 동아리를 나왔지만 여전히 알 수 없는 사람입니다. 곤경에 처한 이를 무척이나 잘 도와주고 일도 성실하게 해냅니다. 그녀는 잔병치레도 잦은 편입니다. 그러나 쉬는 경우는 거의 없죠.
문영에 대한 소문이 회사에 돌았던 것을 지훈은 알고 있습니다. 상사와 불륜관계라던가 칼로 찔렀다던가 하는 종류의 것인데 지훈은 그 말을 믿지 않습니다. 후배는 자신처럼 고양이를 기르는 문영에 대해 물어봅니다. 지훈의 말로는 예전엔 러시안블루를 키우다가 도망간 뒤로 코리안숏헤어를 키운다고 하죠.
여기까지는 아주 평범합니다. 그러나…
이후에 이어지는 고양이 코코의 이야기는 좀 다릅니다. 자신이 코코라고 주장하는 인물은 문영에게 이미 코코라는 고양이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문영은 자신을 은영이라고 부릅니다. 아마 전애인 이름일거라 상상하죠. 핥고 깨물고 피를 마시고 병에 걸려있는 것도 모두 좋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고양이 코코를 질투합니다. 내 밥그릇과 캣타워까지도 코코 차지라면서요. 그러는 그녀에겐 꼬리가 없습니다. 즉, 사람이란 의미죠.
문영은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청결을 유지합니다. 오래된 친구나 지인도 없고, 타인에 대한 두려움과 불쾌감도 있습니다. 문영이 사연을 보낸 글에 따르면, 아파 보이는 구석이 있는 사람들과 망가진 쓰레기에서만 애착을 느낍니다. 문영이 애인이라고 불렀던 사람은 문영과 자신의 관계가 인간관계도 우정도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불륜관계였던 것만큼은 확실해보여요. 그 또한 어딘가 망가진 사람이었고, 문영에게 보살핌을 받았으리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문영은 길에서 고양이 흉내를 내는 여자를 집으로 데려오고, 전애인의 이름인 은영이라고 부릅니다. 혹여나 여자도 나으면 자신을 버리고 사라질까봐 전전긍긍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피를 먹으면 여자의 병이 나을까, 피를 내어서 먹입니다. 남을 보살피고 안정감을 얻지만, 스스로가 보살핌을 받는 존재가 되는 건 두려워하는 듯 싶습니다.
문영의 방에서 문영의 노트를 읽은 은영. 문영은 앞서 말했듯 건강한 사람을 견디지 못합니다. 누군가가 자신을 이유없이 좋아한다는 사실도 믿지 못하죠. 문영에는 남에게 차마 말하지 않는 가정사가 있습니다. 그것이 문영의 성격에 영향을 주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문영의 허벅지의 흉터를 은영은 확인합니다. 이는 문영의 자해흔입니다. 어느날 문영은 나의 허벅지를 찌르곤 미친년이라 소리지르다 도망쳤죠. 이것은 상처를 입은 은영이 자신에게서 떠나지 않기를 바란 문영의 행동입니다. 그러나 문영은 미친년이라고 소리지른 걸 은영이 했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너도 나를 떠날 것이라는 두려움의 표현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원래 기르던 코코 말고도 고양이 소리가 들렸다던 은영의 말을 추측할 때, 은영과 고양이 여자는 명백히 다른 인물일 것입니다. 처음에 러시안블루를 키우다가 도망갔고 코리안숏헤어를 기른다는 말이 혹여 떡밥일까 싶었는데,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러시안블루가 은영을 비유한 표현일까 생각했지만 이미 은영과 살 때는 코코가 있었고 코코는 고양이 여자가 있을 때도 있었으니 아마도 코코의 종은 코숏이겠죠.
문영은 은영과 헤어진 것이 고양이 여자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문영의 신경증일 뿐이라고 생각됩니다. 두서가 맞지 않기에. 고양이 코코는 명확히 드러내진 않지만 고양이 여자 때문에 7층에서 낙사했을 것 같은 뉘앙스를 풍깁니다. 죽은 코코의 꼬리는 고양이 여자에게 조잡하게 달려있습니다. 고양이 여자 또한 문영이 고양이 여자에게 그렇듯이 문영에게 집착하고 있는 것이죠.
여자는 병에 걸려서 자주 토합니다. 은영의 신분증으로 여자를 응급실에서 치료하는데, 이 부분이 사실 의미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닮았던들 타인의 신분증으로 구별하기 어려운 얼굴일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고양이 여자와 은영이 정말 다른 인물인지 헷갈리더군요. 왜냐면 문영은 은영의 말에 의하면, 누군가가 자신을 이유없이 좋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해서 자신에게 보내는 말조차 지어내는 인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은영은 문영이 자신을 칼로 찌른 이후 더 이상 문영을 만난 적이 없으므로 단순히 외모가 닮은 인물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문영은 여자가 자신을 떠날까봐 또다시 전전긍긍하여, 은영에게 그랬듯 이번에는 쇠망치로 여자의 다리를 부러뜨립니다. 여자 또한 쇠망치로 문영의 머리를 내려치고, 죽은 문영의 옷으로 자신이 문영으로 살 것임을 암시합니다.
한 마리의 고양이에게 필요했던 것은 한 명의 주인이었는데, 한 명의 사람에게 필요했던 것은 아무리 해도 채워지지 않는 무엇. 남의 고통을 야금야금 파먹던 것으로는 모자랐지만, 자신의 고통으로는 충분히 채울 수 있었나 보다.
문영이란 여성에 대해서 여러 인물의 시선으로 조명하는 단편 소설이었습니다. 개중에는 직장동료인 지훈의 시선이 가장 평범합니다. 문영은 남을 잘 보살피고 일도 성실히 하는 인물이지만 타인에게 보살핌을 받지 못했고, 자신이 아프면 지탱해줄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을 보살피는 것으로 자신을 지탱하며 살아갑니다.
문영이 전 회사에서 유부남과 불륜관계였다는 말은 낭설인 것으로 보입니다. 문영은 은영이라는 대상이 있었지만, 은영은 문영을 인간관계나, 우정이 아니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문영이 헤어진 은영을 투사하는 대상은 정신이 온전치 못한 고양이 흉내내는 여자입니다. 그렇다면 문영은 유부남과 불륜관계였던 것이 아니라, 은영이라는 여성으로 추측되는 사람과 불륜관계였던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은영은 불륜관계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가족과 친구도 없었던 문영에게 불륜관계였던 은영은 아마도 기혼자였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극중에서 은영과 관련해서 드러난 정황은 딱히 없네요.
문영은 망가지고 아파 보이는 사람과 물건에게 애착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것이 온전해지면 다시 흥미를 잃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다며 무서운 표정을 하고 어머니는 아들인 동생이 모시고 있다는 이야기를 할 때, 문영은 가정에서 탈출한 것으로 보입니다. 동생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지만 어머니를 구박한다며 어머니를 모셔오고 싶다는 이야기를 볼 때, 문영의 경제상황은 남을 부양하기에는 부족한 듯 싶습니다. 아마 이러한 문영의 성향은 어릴 적 가정생활에서 기인했겠지요. 문영이 부모에게서 듣고 싶었다던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는 심하게 아픈 적이 없었어.
별로 돈이 안 드는 아이였지.
그래서 우린 참 안심이었다.
부모에게서 충분히 사랑받은 기억이 없어, 남이 나를 댓가없이 사랑한다는 사실도 믿지 못하는 문영. 문영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가려고 은영은 노력했었지만 결국 그녀를 견디지 못하고 떠나게 됩니다. 다음 인용구를 보면 문영은 울 줄도 모르고 대신 자해를 통해서 해소하는 듯 합니다. 은영은 문영의 허벅지에 그어진 줄을 보고 그녀의 가정사와 여태까지의 행동을 이해하는 듯한 장면이 있습니다.
내가 없는 너는 어떻게 살까. 어떻게 아파하면서 살까. 혼자서는 울 줄도 모르는 네가, 칼로 몸을 푹푹 찌르면서 눈물 대신 피를 뚝뚝 흘리는 네가, 내가 없으면 어떤 다른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을 돌보면서 너를 돌보아 낼까.
문영과 고양이 여자는 닮은 구석이 있습니다. 문영은 정서적인 상처가 있고 고양이 여자는 정신적 질환과 병이 있죠. 이처럼 반영구적인 결손이 있고 상대를 온전히 소유하고자 하는 고양이 여자의 집착과 상대가 떠나지 않고 결함을 가진 채로 자신의 곁에서 보살핌 받기를 원하는 문영의 욕구는 닮아있죠.
여기까지는 문영과 은영, 고양이 여자에 집중해서 이야기를 따라가보았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만약에 문영의 이야기는 그녀가 지훈의 회사로 온 후의 이야기였고, 문영이 유부남과 불륜관계였던 것이 맞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하고요. 그렇다면 문영이라는 소설은 문영의 망상이 되어버리겠지요. 남자에게 버려진 트라우마, 가족에게 사랑받지 못한 상처로 인해 은영이라는 대상을 만들어내 스스로 돌보는 여자.
너의 어머니가 자주 아파서 매일 엄마가 죽으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던 것, 남동생이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하고 있는데 돈을 잘 벌어온답시고 엄마를 구박한다며, 할 수만 있다면 네가 엄마를 부양하고 싶다던 것
문영은 남들처럼 살아보는데도 열심히 살아야 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까지 열심히 살 필요는 없다는 말에도 그녀의 마음은 여유롭지 못한 것이겠지요. 고양이 여자는 사람이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누워있는 문영에게는 고양이의 털이 닿은 것 같기도 하고 사람이었던 것 같기도 한 느낌으로 다가오지요. 현실과 망상의 경계가 무너지는 부분인 듯 싶습니다.
흡혈귀에게 피를 주면 흡혈귀가 되듯, 고양이에게 피를 주면 고양이가 되지 않을까. 아니면 내가 고양이가 된 후에 저 여자는 인간으로서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남을 보살피며 살아왔던 문영이지만, 실은 스스로 보살핌이 필요했던 문영의 모습이 나타나는 문장입니다. 문영이 키우는 고양이는 고양이라서 자신을 떠나지 않죠. 고양이 흉내내는 여자는 다름아니라 자신을 떠나지 않을 상대를 형상화한 문영의 망상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혹은 문영 자신이 고양이가 되어서 그녀에게 속하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문영이 헤어진 애인인 은영의 이름을 여자에게 붙여주는 것도 그러한 맥락으로 이해됩니다.
상상 속에서 연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어머니와 단 둘이 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양 손에 힘을 주어 목을 꽉 졸라버려도 살인자라고 불릴 일도 없을 것 같다.
문영에게 어머니 또한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인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머니의 목을 졸랐던, 어머니가 그녀의 목을 졸랐던 말이죠.
고양이를 흉내 내는 여자는 자신의 다리를 분지른 쇠망치를 들어 문영의 머리를 겨냥했다. 단단한 망치와 작은 머리통이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 피가 찐득찐득하게 망치에 묻었다. 문영의 머리 위로 뚝, 뚝 떨어진 눈물방울이 피에 섞여 흘러내렸다. 그 모습이 천장에 붙어 있던 전구에게만 목격되었다.
문영의 집에서 일어난 일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오로지 고양이 여자와 죽은 문영만 기억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