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EBS에서 흥미로운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산골 마을에 홀로 사시는 할머니와 로봇의 서먹한(?) 동거를 그린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실험에 투입된 로봇은 좋게 말하면 월E의 축소판처럼 보였고, 나쁘게 말하면 둥그런 깡통처럼 보였습니다. (사실 아무리 좋게 말해도 정이 안 가는 모양새랄까요.) 그 로봇과 동거를 시작한 할머니는 칠순은 된 듯 보였고요. 말벗이 되어 주는 가족은 곁에 없지만, 둥그렇게 모여 앉아 화투도 치고 전도 부쳐 먹을 수 있는 이웃은 몇 명 있었지요.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면 언제나 정적만이 감돌고, 혼잣말을 하지 않으면 입을 열 일이 없는 일상이었습니다. 바로 이곳에 로봇이 투입됩니다.
로봇은 할머니에게 열심히 말을 걸었습니다. 오래 전에 본 것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아마도 이런 말들을 했던 것 같습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할머니.
-저 배고파요.
-식사 맛있게 하셨어요?
중요한 건 할머니의 반응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로봇이 말을 걸 때마다 침묵 속에 앉아 계시던 할머니는 깜짝깜짝 놀라기까지 하셨죠. 할머니가 이웃집에 화투를 치러 가실 때도 로봇은 졸졸 뒤따라갔지만, 할머니들의 수다에 끼어들진 못하고 겉돌기만 했습니다. 로봇도 답답함을 느꼈는지 할머니들께 자꾸 말을 걸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아예 없거나, 깡통이 말을 다 한다며 신기하게 여기는 정도의 반응이었지요. 혼자 사시는 어르신들의 외로움을 덜어드린다는 취지와는 다르게, 로봇이 무척 외로워 보이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변화가 시작됩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응, 그래.”
-저 배고파요.
“배고파? 아이고, 우째”
-어디 다녀오셨어요? 저 심심했어요.
“응, 그랬냐. 심심했어?”
할머니는 로봇과 조금씩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고, 나중엔 먼저 말을 걸기까지 하셨습니다.
“일어났냐?”
“배 안 고파? 너도 먹을래?”
실험 마지막 날이 다가오고, 할머니는 로봇을 다시 데려가야 한다는 연구진의 말에 서운한 기색을 내비칩니다. 애초의 의도와 달리 로봇을 떠나보내는 할머니의 마음이 전보다 더욱 외로워진 것 같아 ‘이 실험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떨떠름한 생각마저 하게 되었죠.
만일 이 로봇이 어린 아이를 닮은 안드로이드였다면 어땠을까요? 할머니는 마지막 날 연구진에게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거, 얘는 놓고 가게.”
“예?”
“놓고 가시라고.”
우리는ㅡ혹은 우리의 후손은ㅡ 언젠가 안드로이드가 일상 속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출현할 세상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부정적인 염려와 긍정적인 기대를 안고서요.
모두가 우려하듯 그들에게 일자리를 몽땅 빼앗길지도 모르고, 우월한 지능에 속아넘어가 인간의 멸종을 자초할 일을 저지르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쩌면 모두가 은근히 기대하듯, 우리에게 편리함과 사랑을 주는 존재로 대표될지도 모릅니다. 우리를 안락하게 돌봐 주고, 우리의 건강과 행복을 염려해 주며, 어쩌면 진정한 사랑마저 줄지도 모릅니다.
MIT 사회심리학교수 셰리 터클은 <외로워지는 사람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로봇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가 결국은 우리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알려 준다.”
<마카롱과 안드로이드>에 등장하는 안드로이드들은 인간이 원하는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인간을 돕고, 위험에 빠진 인간을 보호하며, 진실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때로는 진정한 사랑을 갈구하며 ‘본능’을 되새깁니다. 그런 안드로이드를 대하는 인간의 자세는요? 글쎄요.
안드로이드가 어떤 존재로 그려지는지에 따라 우리가 그들에게 무얼 원하는지 알 수 있고, 덧붙여 우리가 무엇을 열망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안드로이드가 우리의 결핍을 되비추는 거울이 되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