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그책의 <쓰레기 줍는 남자>를 읽고 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쓰레기 줍는 남자 (작가: , 작품정보)
리뷰어: 태로, 18년 12월, 조회 119

어느 날 딸이 죽었다. 집을 뛰쳐나간 딸은 시체가 되어 돌아왓다. 딸이 죽었다. 딸을… 죽였다.

남자는 딸을 죽였다. 직접적으로 살해한 것은 아닐지라도 분명 그녀를 죽게한 가장 큰 원인을 제공했다. 그는 이미 딸의 시체를 보았고 딸이 죽었다는 사실도 인지한 상태이다. 본인 때문에 딸이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을 터다. 그래서 그가 이미 죽고 없는 딸을 찾아 전단지를 붙이고 다니는 일은 어떤 속죄로도 읽힌다. 평생에 걸쳐 수행해야 할,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완수할 수 없는, 속죄.

그는 또한 아내를 잃었다. 살던 집에서 쫓겨나고 우연히 만나 가족이 될 수도 있었던 강아지에게도 버림받았다. 산처럼 쌓인 쓰레기더미 앞에서 이제 완전히 혼자가 된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어떤 문구를 떠올렸다. “때로 영화의 최선은 관객의 안에 진정한 갈등을 심는 것이다. (김혜리)” (여기서 ‘영화’는 예술 일반으로 대치하여 읽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는 잔인한 가정폭력범이라는 사실을 바뀌지 않는데도 독자들이 그에게 공감하고 더 나아가 이입까지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작가의 묘사에 있다. 이 짧은 소설의 하이라이트는 ‘딸을 줍는’ 풍경으로 시작한다. 시체를 발견하는 일이 ‘줍는다’는 행위와 연관지어져 쓰인 문장. 그 이미지 하나로 작가는 한 문단을 강렬하게 써내려갈 수 있었다. ‘쓰레기와 딸은 모두 불타 재가 된다’는 발상으로 딸은 곧 쓰레기와 같은 처지가 되고, 더미 위로 떨어지는 쓰레기들은 수십 명의 딸이 된다. 이리저리 떨어지는 쓰레기들은, 다시 말해 ‘나’에게 맞으며 살려달라고 비는 딸은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갈퀴손이 또다른 쓰레기를 집어올리듯이 폭력은 건조하게 계속되고, 그 갈퀴손은 ‘나’의 관자놀이를 조이는 형구가 된다.

수 차례 연쇄하는 이미지는 그 역할을 완전히 해내고 독자들은 딜레마에 빠진다. 남자에 대한 판단을 쉽사리 내릴 수가 없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런 현상은 앞서 말했듯 어떤 예술적 성취로 볼 수도 있다. 관객 안에, 그러니까 ‘독자 안에’ 갈등을 심는 것. 우리가 이 소설 앞에서 남자에 대한 처분을 보류하고 망설이게 될 때 이 소설은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이런 작품 안에서라면 나는 언제든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길을 잃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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