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풋풋한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남 잘되는 이야기에 환상 같은 걸 가지고 있는지 소년과 소녀가 만나 서로 소통하는 이야기는 아무리 진부한 플롯이더라도 일단 눈여겨 보는 편입니다. 누군가는 너무 오래 우려먹어 사골이 다 되었다, 이젠 좀 질리는 소재다, 라고 말할지라도 전 고전미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고분에서 출토된 고구려 수박도에도 낯선 소녀와 만나는 소년의 이야기가 그려져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무튼 「케이크래 판타지아」는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입니다. 낯선 소녀와 만난 소년이 특별한 경험을 공유하는 내용이지요. 분명 용이 언급되는 걸로 보아 판타지적 세계관일 테지만, 이 이야기가 아라비안나이트에서 발췌했다고 말해도 믿을 정도로 환상적 소재가 적게 등장합니다. 이를테면 사산왕조 때 술탄의 열세 번째 딸이 있었는데, 다른 나라의 재상들을 만나러 가던 중 어떤 고기잡이 소년을 만난다는 내용으로 말이죠.
소설은 소년이 어떻게 소녀를 만나게 되었으며, 소녀를 위해 어떤 행동을 하는지를 중심 소재로 삼습니다. 소설 초반부 고양이를 쫓다 우연히 옹주와 만나게 된 아림은 온갖 종류의 구속도구를 지참한 옹주와 케이크에 대한 잡담을 나누다 헤어집니다. 사실, 소설에서 가장 몰입이 된 부분 하나를 뽑으라면 전 주저 없이 아림과 옹주의 첫 만남 부분을 뽑을 겁니다. 옹주의 첫 인상이 굉장히 강렬했기 때문입니다. 옹주란 인물에 대해 전 의문을 느꼈습니다. 어디 사는 누구인데 저런 불쌍한 몰골인 걸까?
아림은 옹주에게 들은 ‘네 냄새가 좋다’는 말에 좋아라 하며, 옹주를 위한 케이크를 만듭니다. 중간에 케이크를 가져다주다 사고를 당하는 이야기도 나오지만, 전 눈여겨보지 않았습니다. 우연히 어떤 남자가 가져다준 케이크 레시피로 다시 케이크를 굽거든요. 남자는 자길 도와주면 옹주를 만나게 해주겠다고 제안하며 아림에게 기회를 제공합니다. 아림은 남자의 도움으로 옹주와 재회하고 직접 만든 케이크를 옹주에게 전해주는데 성공합니다.
이야기가 전부 끝났지만 전 많은 의문이 남아있었습니다. 아림이란 녀석은 겨우 열여섯 살밖에 안된 주제에 만나는 사람마다 ‘여자에게 고백하느냐’란 말을 듣습니다. 대체 평소에 뭘 하고 다니던 아이일까요? 옹주에게 고백 비슷한 걸 하겠다는 아림을 그러려니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니 아림은 상당한 프로였던 게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아림이란 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자세히 언급되지 않지요. 그냥, 물고기를 잡는 아이. 정도로 이야기 되고 끝입니다.
옹주에 대한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작중 내용으로 미뤄 짐작해볼 때 옹주는 왕의 총애를 받는 아이이며, 나쁜 물이 들지 않도록 세상과 극단적으로 격리된 삶을 살고 있는 인물입니다. 다리가 묶이고 눈가리개와 재갈을 차고 생활하는데, 그에 대한 언급은 딱히 되지 않습니다. 그냥 어렸을 때부터 답답함에 길들여져 특별한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갔지만 석연치 않은 건 사실입니다.
소년과 소녀가 등장하는 소설에서, 저는 소년과 소년이 만나 무엇을 했느냐를 집중해서 읽습니다. 알퐁스 도데의 단편소설 「별」에 등장하는 양치기와 아가씨는 양떼가 낮게 우는 밤의 오두막에서 밤하늘의 별자리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지요. 또 황순원의 「소나기」에 등장하는 소년과 소녀는 한적한 시골 산을 함께 구경하다 수수밭 짚단 사이에서 소나기를 피합니다. 전 소년과 소녀가 무언가를 체험하며 같은 경험을 공유한다는 사실 자체에서 어떤 즐거움을 느낍니다. 「케이크래 판타지아」에서 소년과 소녀는 케이크를 나눠 먹지만 둘 사이 관계에 집중했다보다는 아림의 기상천외한 여성편력에 람람옹주를 추가했다는 식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아마 카페 점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겠지요. ‘이번 고백은 성공하길 바라.’
아마 제가 소설의 내용을 이렇게 이해하는 이유는 소설 속 인물의 내면에 대한 이야기가 적게 등장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만일 아림은 람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혹은 람람은 아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등이 서술됐다면 전 그 서술이 제시한 방향을 따라 읽어갔을 겁니다. 하지만 소설에서 아림은 동냥으로 배운 문자로 케이크 레시피를 읽어 자기 냄새를 칭찬해준 옹주에게 선물을 줄 뿐이었고, 도대체 속내를 알 수 없는 옹주는 그걸 기쁜 마음으로 먹습니다. 작중 옹주는 높으신 분들과 식사는 불만족스럽다는 어투로 말하지만, 그걸 제외하고 현재 생활에 대한 감상은 언급되지 않습니다. 뭐가 뭔진 모르겠지만 옹주는 아림이 마음에 든 모양입니다.
소설은 옹주와 헤어진 아림이 상단은 바다를 건너느냐 물으며 케이크래 판타지아의 레시피를 생각하며 끝이 납니다. 헤어진 옹주와 재회할 기회가 있는지를 묻는 장면 같은데, 만일 제가 람람과 아림의 관계에 집중했다면 둘 사이의 재회를 기대하며 마무리됐을법한 장면이었습니다.
고기잡이 소년과 한 나라의 옹주가 만난다는 내용. 전 그 소재만으로 충분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단순히 말해서 제 취향이었습니다. 소설은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 즉, 읽고 즐기기에 충실한 소설로 어떤 사회상을 담아낸다던가, 비유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다거나 하진 않습니다. 소설의 경중을 중시하는 분들에게는 선뜻 추천하기 힘들 수도 있지만, 단순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고 싶은 분들에게는 읽어볼만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