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작가님. 소설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꽃’이라는 작품의 후속 작품이라고 알고 있지만 전작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지침은 없는 것 같아 독립적인 작품이라 생각하고 감상을 작성하였습니다.
일단 서정적인 문체와 작품의 초반부에 배인 소슬한 분위기가 좋았습니다. 호러 장르에서 적절한 분위기가 가지는 비중은 크다고 생각하는데 그러한 면에서 본 작품이 구축한 분위기는 상당히 효과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작품이 점차 방향을 잡지 못하고 헤매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작품의 분위기가 괜찮으니, 계속 몽환적인 서사로 끌고 나가 마무리를 지었어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만 주인공과 계부 간에 벌어졌던 사건이 서술되면서 작품의 인상이 보다 현실적으로 바뀌었고, 글을 읽는 입장에서는 그 시점에서부터 무언가 구체적인 내용이 더해질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꽃에 대한 설정이나 주인공의 서사에 있어 충분한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이도 저도 아닌 허무한 느낌만 남게 된 것 같았습니다.
설정에 대해 말하자면, 트리거를 작동시켰을 경우 의도치 않은 파국을 불러오는 물건을 다룬다는 점에서 저는 일차적으로 클라이브 바커의 헬바운드 하트라는 작품을 연상할 수 있었습니다. 바커의 해당 작품에서는 본 작품에서의 꽃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상자가 등장하는데, 그 상자를 열면 다른 차원에서 잘생긴 수도사들이 나타나 상자를 연 사람을 고문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 상자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열었건 운이 나빠 실수로 열었건 같은 효과를 나타내며, 희생자를 선택하는 데 있어 일체의 규칙이나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본 작품에 등장하는 하얀 꽃은 트리거를 누르도록 만들 사람을 선정하는, 혹은 선정 받는 부분에서 나름대로의 규범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구태여 주인공의 꿈에까지 나타나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는 대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설령 꿈 장면이 ‘어린 시절에 잠깐 보았던 신비한 꽃이 주인공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는 사실만을 보여주기 위해서 삽입된 것이라고 해도, 작품을 읽는 입장에서는 작중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가 주인공의 꿈에까지 나타난 것이니 둘이 연관되어서 무언가 의미가 생성되는 것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면에 도사린 규칙이나 의도, 아니면 최소한 희생자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관계성이 무엇인지가 명확하게 드러나야 좋을 텐데 작중에 기술된 희생자들의 목록을 살펴봐도 서로 별다른 연관성이 없는 것 같아 혼란스러웠습니다. 꽃을 묘사하는 부분이 성적인 은유처럼 보여 성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자면 아이를 죽인 엄마가 제대로 설명이 되지 않고, 불합리한 피해를 입은 사람이 대상자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애인과 가족을 죽인 사람, 특히 가족을 살해한 남자가 꽃에 대해 묘사하는 대목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 하다못해 꽃이 텔레파시 같은 것으로 사람을 홀려 자신을 붉게 칠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라고 생각하려 하면 역시 아기를 죽인 후로도 끝내 애착을 버리지 못해 시체를 안고 다닌다던 여자와, 딱히 저항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음에도 꽃을 꺾지 않았던 어린 시절의 주인공이 보인 행동이 설명되지 않고, 이러한 식으로 꽃에 대한 설정을 종잡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바커의 작품처럼 오로지 우연에 의해서만 꽃이 작동된다는 설정이라면 주인공이 이 꽃과 연관되어 무언가 서사를 이끌어나가는 전개가 이어져야 할 것 같았지만, 그 점에 있어서도 구체적인 내용이 제시되지 않았다는 생각입니다. 주인공이 작중에서 한 유일한 일은 ‘꽃을 꺾으면 사람을 죽인다’는 관계성을 발견한 것인데, 사실 이건 앞서의 세 희생자가 모두 꽃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과 그들이 남긴 증언을 조합하면 작중 세계관의 누구나 생각해볼 수 있을 법한 내용이라 주인공이 자신만의 경험을 통해 무언가 새로운 정보를 알아냈다는 전개로 보기는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깨달은 주인공은 그 이후로 사실상 아무 일도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꽃을 꺾은 것도 아니고, 꽃을 꺾는 것을 거부한 것도 아니고, 자신만의 힘으로 계부에게 맞선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주인공과 계부 사이에서 있었던 사건이 어떠한 방향으로도 봉합되지 않은 채 그대로 이야기가 끝나버리니 저로서는 조금 당황스러웠습니다.
결국 분위기, 설정, 서사라는 세 분야에 조금씩 발을 디디고 있지만 어느 곳으로도 뻗어나가지 않고 마무리가 지어져 아쉬웠다는 것이 제가 소설을 다 읽고 받은 감상이었습니다. 아예 구체적인 부분을 지워버리고 산문시풍의 환상적인 호러로 노선을 잡거나, 꽃에 대한 설정을 보다 구체적으로 보강해서 러브크래프트풍 혹은 보르헤스풍의 호러를 시도하거나, 아니면 주인공과 계부 간의 이야기를 확실히 매듭지어 정석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식으로 작품의 방향성이 명확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