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로 오랫동안 돈줄이 마르다 보면 계약직이라도 하고 싶고 계약직을 오랫동안 하다 보면 정규직이 되고 싶고 정규직을 오랫동안 하다 보면 남보다 먼저 승진이 되고 싶고 이도 저도 안 되고 일에 치이고 야근만 계속 하다 보면 퇴직이 하고 싶고…
허나 그것도 쉽지 않은 일. 자고 나면 자영업자들의 페업 소식이 들려오는 요즘 같은 때는 퇴직을 하고 근사한 가게를 하나 낸 다음 사장님 소리를 들으며 돈을 끌어 모으는 상상은 상상일 때 좋을 뿐일지도 모른다. 직장 안이든 밖이든 적자생존의 전쟁터가 된 지는 벌써 오래 된 일.
퇴직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람들, 살기 위해서 옳지 않은 선택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었다. 맞다. 다수의 사람들의 생각처럼 뭐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의 주인공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다수에게 끝까지 옳지 못하다고 설득하다가 욕을 먹던 주인공이 파란 서류철을 들고 다가갈 때는 가슴이 먹먹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당신만은. 당신만은 안돼….!
소설은 옆 부서의 김경애 사원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며 시작한다. 정규직 전환을 앞두고 회사에서 일하던 도중 과로사한 김경애씨. 근데 그녀는 반짝 뉴스에 났다가 잊혀져 버렸다고 하고 매일 과로사로 죽는 사람들이 많다고 주인공은 말한다. 뭔가 새로운 리얼 직장 잔혹사인가보다, 생각하며 글을 읽어나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귀신이 되어 나타난 김경애씨로 인해 이야기가 판타지 호러로 변하는가 싶었다. 아무리 굿을 하고 온갖 비용을 들여 퇴치에 공을 들여도 사라지지 않는 김경애씨. 자신을 과로사하게 한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려는 내용이려나? 그런데 또 반전이 일어난다. 일하다 죽은 것도 억울한데 이 김경애씨는 귀신이 되어서도 야근을 한다. 뭐라고? 귀신이 야근을? 그것도 그냥 자리에 앉아서 시늉만 하는 것이 아니라 usb에 결과물까지 저장해주는 친절한 야근러이다.
세상에 야근을 하는 귀신이라니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귀신이라 신선했다. 머리를 늘어뜨리고 흡뜬 눈에 공중을 붕 날라 와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고 야근을 못하게 하고 야근을 시키는 상사를 통쾌하게 집어던져 주려나? 했던 기대는 사라졌다. 하지만 이건 그동안 나타난 귀신들에 익숙해진 내 편견 때문이다. 세상엔 복수혈전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렇게 진행됐다면 이야기는 오히려 진부해졌을 거였다.
회사는 계속 돌아가야 하고 일은 계속 진행되야 한다. 야근 역시 모두가 열심히 해야만 한다. 귀신이 나타나든 말든 말이다. 사실 이 사실이 귀신보다 더 무섭다.
일하다 사람이 죽었으니 한동안 조심하며 야근을 자제했던 회사가 차츰 야근을 시키기 시작하고 옆 사무실 그 옆 사무실 야근의 물결이 번져 와 결국 김경애씨가 일하던 사무실까지 다다랐을 때 마침내 김경애씨가 나타난다. 그리고 결국 직원들이 김경애씨한테까지 야근을 시키기 시작했을 때 깜짝 놀라게 된다. 판타지적인데 이게 왜 이렇게 리얼한 느낌이 드는 걸까? 만약 귀신이 밤마다 사원들을 괴롭히고 정전을 시키고 놀래키고 한다면 정말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 텐데 말이다
귀신에게 일을 시키는 직원들을 보고 나도 처음엔 너무하네 그런 생각을 했지만 결국 ‘살기 위해서’ ‘ 과로사하기 싫어서’라는 말에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정말 이거야말로 부조리하지만 누구나 넘어가고 싶은 유혹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꿋꿋한 우리의 주인공은 주인공답게 사람들을 설득하고 다닌다.
정말 그러시면 안 되는 거잖아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야근하다 잘못된 동료한테 정말 그러시면 안 되는 거잖아요.
이 주인공처럼 행동해야 맞다. 그래서 파란 서류철을 들고 주인공이 결국 경애씨에게 걸어갈 때 살짝 배신감 같은 게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안의 ‘옳음’은 다른 직원들에게 핍박받고 재수없다고 비난 받으며 직장내 왕따가 될지언정 끝까지 주인공만은 옳은 걸 지켜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소설은 끝까지 읽어야 한다. 반전이 준비 돼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반전도 유쾌했다.
우리 직장인들이 야근 없이 ‘저녁이 있는 삶’을 온전히 누리는 건 아직 먼 일일까? ‘기괴하고 이상한 이야기’라고 하지만 다시 한번 현실을 똑바로 들여다보게 해주는 재밌는 소설이었다. 우연히 시리즈 중의 가장 나중 것을 먼저 읽었는데 나머지 기괴하고 이상한 이야기들도 구경하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