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주의]
브릿G에 가입하고 나서 처음으로 완주한 장편입니다.
저는 원래 주로 역사를 소재로 소설을 써왔고, 특히 동양 역사나 고전에 대해서는 (그리 조예가 깊지 못하지만) 관심이 있었기에 <회남자>에서 시작된 이 참신한 재해석에 꽂혀서 누운 자리에서 전부 읽어버렸습니다. 현재 새벽 3시 10분, 아마 리뷰를 다 썼을 무렵에는 동이 터올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기왕 삘 받았을 때 쓰는 것이 좋겠죠.
1. 장점과 단점
이 작품은 장점과 단점이 매우 명확합니다.
먼저 장점부터 말씀드리자면, 굉장히 참신하기도 하거나와 짜임새가 조밀합니다. 작가의 지적 설계와 논리적 구성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청록의 시간>은 여간한 기성작가들 못지 않은 정교함을 자랑합니다. 아니, 어떤 부분에서는 뛰어넘었다고 보입니다. 이러한 부분은 분명히 작가 분의 큰 강점이며, 오랜 시간 고심하셨을 것이 짐작되는 만큼 자랑스러워 하셔도 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읽다보면 ‘어떻게 이렇게 사소한 부분에서 이런 발상을?’ 혹은 ‘아, 이게 이렇게 연결되는 거구나.’ 싶어서 감탄한 부분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런 부분을 찾아가는 것도 분명히 독자로서의 큰 기쁨이고 지적 유희입니다.
단점은 장점과 동전의 양면처럼 떼놓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앞서 다른 리뷰어가 지적하셨듯이 지나치게 설명이 많다는 것, 혹은 전개를 설명에 의존한다는 것.
하지만 저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본질적으로 이 작품은 ‘감정적 설계’가 지나치게 부족하다고 느꼈습니다.
저 또한 글을 쓰면서 대사를 쓸 때 감정보다는 논리의 설계로 대화를 이끌어나가서, 나중에 읽다 보면 둘 다 아주 조리 있고 논리적으로 대화를 전개해나가지만, 소설이라기보다는 논설문처럼 되어버리는 경험을 여러 번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우고 감정의 터치를 어떻게 넣을까 고심한 적도 여러 번이었죠.
감정적 설계가 부재하면, 즉 그 상황에서 주축이 되는 감정이 없다면, 제공되는 모든 타당한 정보와 논리가 같은 강도로 의미가 있습니다. 이 작품은 바로 그 측면에서 문제가 됩니다. 지엽적인 부분과 중심적인 부분의 묘사나 정보 전달 구분 없이 모든 정보가 계속 독자들에게 던져집니다. 또 독자로서는 알아서 그걸 선별할 단서조차도 없습니다.
작가분은 분명히 논리적으로 매우 탁월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소설을 읽을 때 독자로서 기대하는 것은, 주인공의 여정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면 아무리 짜임새가 훌륭한 소설이라고 하더라도 약간 미적지근한 기분을 느끼며 마지막 장을 덮게 될 테니까요.
2. 작품에서 단점이 부각되기 시작하는 시점
지적하는 ‘감정적 설계의 부족’ ‘이입할 수 있는 여지가 부족함’이라는 문제는 사실 3부부터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심하게 두드러집니다.
1부나 2부에서는 그럭저럭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어요. 왜냐면 1부의 경우 한 제국 당시를 배경으로 회남왕 유안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기 때문에 반쯤은 역사서를 보는 기분으로 읽었기 때문입니다. 동양 고전이나 설화 속 인물들에게서 입체적이고도 생동감 넘치는 인물 묘사까지는 잘 기대하지 않아요. 다소 삽화적으로 소개되거나 설명에 치중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대로 그런 분위기가 오히려 시대상을 살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을 겁니다.
2부의 경우는 1990년대에 대학생이었던 재호를 중점적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미스테리한 진주, 앞에서 등장한 회남왕 유안과의 만남까지 흥미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일단 현대인으로서 재호는 우리와 같은 세상을 살며 비슷한 세계관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또한, 조현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약자가 되어 고통받는 재호의 모습은 무척이나 안쓰럽고, 앞으로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을지도 걱정이 됩니다. 회남왕 유안과의 만남으로 풀리는 떡밥에 자연히 집중하게 되죠.
그러나 2부 마지막 부분에서 재호는 누가 봐도 죽은 것과 같은 상태가 되며 우리가 느끼는 감정선은 모두 리셋되어버립니다. 이런 구상 자체로 작품의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겨우 쌓아온 흐름이 뚝 끊겨버리기 때문에 독서라는 체험이 갑자기 고통스러워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박사는 정말이지 배신을 하기 위해서 배신을 하는 듯 작위적으로 등장한 캐릭터입니다. 이런 식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한두 명이 아니죠.
3부의 경우 인간은 멸종해버린 미래사회에서 로봇들이 주축이 되고, 낯선 세계관과 설정을 끊임없이, 숨 가쁠 정도로 독자들에게 설명을 합니다. 재호가 죽은 충격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우리는 전혀 모르는 세계의 이야기를 받아들여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 셈입니다. 이 부분에서 많은 독자는 감정적으로 3부의 세계와 연결되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복잡한 설명은 완충재 역할을 하기는 커녕 더 딱딱하게만 다가옵니다.
새로 등장하는 인물들이 2부의 재호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라면, 3부의 전개가 2부보다 더 재미있다면 무시할 수 있는 문제일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앞서 누누이 말하듯이 3부는 미래사회이기 때문에, 이 배경을 독자가 이해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정보를 독자에게 우겨넣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나도 모르는 사이 미래 사회로 왔다. 여기서도 내 뇌를 이용하려고 한다. 어떻게 보면 가장 감정선 연출이 중요한 부분인데 3부에서는 그냥 재호의 분개한 대사 몇 줄로 빠르게 처리해버리고 있습니다.
3. 그래서 주인공은 대체 누구임? 주인공에게 무슨 매력이 있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재호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회남왕 유안이든 마고든 인류의 운명이든 모두 재호에게로 모이거든요. 마고까지 합쳐서 더블 주인공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둘 다 주인공이라기에는 뭔가 많이 흐릿합니다.
재호의 경우 끝에 가서는 인류는 멸망하고, 마고와는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되잖아요. 이런 과정에서 정신적인 성숙이랄지 무슨 통찰이랄지…그런 것이 보이지가 않고 인물이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그대로인게 아쉬웠습니다.
마고의 경우 오히려 1부에서는 칼을 휘두르는 활극을 펼치면서 뛰어난 여전사로 보였는데, 나중에 과거에서 계속 남자들에게 피해를 당하고, 살해당하는 등 일방적인 피해자 포지션으로 퇴보합니다. 3000년대 남자들이 어떤 인간들일지 모르니 같이 가줄 남자를 구한다, 그게 하필이면 재호였다는 서사가 너무나도 납득이 되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거렸습니다.
재호는 작중에서 잘생겼다든가 인기가 많았다고 묘사되지만, 독자로서는 재호의 얼굴을 볼 수 없으니 그런가 할 뿐입니다. 재호만의 특별함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재호가 주인공으로서든, 마고의 동반자로서든 서사에서 설득력을 가지려면요.
지금으로서는 마고의 최후는 처음 1부를 읽었을 때 ‘중국 신화 전설의 마고인 줄 알았는데 아니네. 훼이크였나.’ 했다가 결말부에서 ‘이게 그거였구나.’라는 반전으로서 기능하는 정도입니다. 이마저도 중국 신화에 대해서 배경지식이 풍부하지 않은 독자층에게는 별로 와닿지도 않고 허탈하기만 할지도 몰라요.
열린 결말도 좋지만 마고가 마지막으로 우주의 시작을 보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나 재호의 엔딩 등, 어느 정도는 인물의 삶에 대해서 결론을 지어주세요. 이 인물들은 그 정도 존엄을 받을 자격이 있었습니다.
4. 문제를 해결하려면
캐릭터성의 부재를 어떻게든 처리해야 한다고 봅니다. 제가 볼 때는 이거야말로 만악의 근원입니다. 일단 인물들은 설정만 있지 심리가 없습니다.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굉장히 피상적인 감정 표현만을 그것도 최소한도로만 드러내기 때문에, 캐릭터들이야말로 로봇처럼 보입니다.
인물이 성격이 없으니 감정이 없고, 감정이 없으니 말투도 없습니다. 애초에 성격이 없고 욕구가 없는데 인물들끼리 갈등이 일어나 이야기가 전개될 리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3부 전개의 대부분의 갈등은 대화로만 이루어집니다. 그건 4부도 마찬가지지만요,.
대화 중에 “하하핫!”이나 “흠”같은 부분이 계속 반복되는 것은 아마 설명문만 이어진다면 딱딱하기 때문에 작가분이 중간중간 넣으신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 경우 어색함만 가중될 뿐이었습니다. 독자도 같이 웃고 싶은 부분이 아닌데도 웃음이 과도하게 반복되면, 작품의 내용과 독자의 감정선이 이탈됩니다.
저는 이 작품이 굉장히 흥미롭고 짜임새가 높다고 감탄하면서 읽었지만, 그런 순간에도 진정으로 작품에 이입할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면 인물에게 입체성이 전혀 없었고, 어떤 선택을 한다고 하더라도 논리적으로 등장인물의 행동에 설득당할 뿐 공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어려웠습니다.
그런 3부의 문제는 결국 4부에서 정점에 다다릅니다. 4부에서는 스토리뿐만이 아니라 캐릭터들의 감정도 클라이맥스에서 한 번 터지고 정리되어야 한다고 봤습니다. 일단 4부에는 감정적으로 중요한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인류의 생존자들이 이들을 희생시키고 식인하려고 하는 부분, 심지어 노인과 어린아이까지도 재호와 마고를 먹으려고 하는 바람에 몰살해야만 하는 부분. 마고 = 진주임을 재호가 알게 되는 부분. 마지막에 마고가 수명이 거의 남지 않아서, 태초로 돌아가서 여신이 되며 떡밥을 정리하는 부분.
독자들의 입장에서 6차원의 문제나 유기물을 육체 삼아 재생되는 설정 등이 얼마나 말이 되는지는 사실 그렇게까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적당히 그럴싸하기만 해도 되죠. 왜냐면 소설이니까요.
4부에서 재호나 마고에게 이입할 수 있었던 부분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납득은 됩니다. 저 상황에서라면 저라도 인류를 죽이고 살아남았겠죠. 하지만 거기까지입니다. 인류를 다 죽이고 두 남녀가 무쌍 찍는 부분은 분명히 절정인데도, 와닿지가 않는다는 게 큰 문제였습니다.
전반적으로 인물들은 끊임없이 극단적인 상황에 처하는데도, 너무나도 쿨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인물들에게 감정을 좀 주세요. 그러면 이 작품은 지금보다 더 읽기 쉬운 작품이 될 겁니다.
저도 이 글에 지적한 내용 중 대부분을 지금도 글을 쓰면서 의식하고, 겪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을 읽으면서 꼭 리뷰를 쓰고 싶었습니다. 작가분이 세계관을 구축하기 위해 쏟으신 노력은 분명히 MAX 찍었는데, 캐릭터 묘사의 미흡한 부분 때문에 이 작품이 독자에게 외면당한다면 무척 슬픈 일이 될 것 같거든요.
5. 사족 OR 요약
다 쓰고 나니 단점 위주로만 한가득 나열한 것 같아 좀 죄송스럽기까지 합니다. 작가분이 구축한 세계는 분명히 매력적이고도 정교한 하나의 우주입니다. 다소 배경지식을 요구하기 때문에 장벽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오히려 동양 역사나 고전, 신화쪽에 관심을 가진 매니아층에게는 충분히 어필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이제 논리와 감정이라는 두 축 중에서 논리에는 더 더할 것이 없고, 오히려 지나치게 밀도 높은 부분은 다소간 줄여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없는 부분인 감정을 위주로 채워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근래에 보기 드문 시도였고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언제나 건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