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마우스가 아무리 귀여워도 톰과 제리가 쫒고 쫒기는 장면을 깔깔거리며 보고 자랐어도 쥐는 무섭다. 진짜로 보면 정말 무섭다. 다람쥐는 귀엽긴 하지만 그냥 미끈한 꼬리를 가진 쥐는 그냥 보기만 해도 징그럽고 무섭다.
쥐는 옛날부터 인간에게 하등 쓸모없는 생물이었다. 병이나 옮기고 음식을 망치고 정서를 심히 해치는 비위생적이고 불결한 존재로 잡아 없애야 할 무엇일 뿐이었다. 현대에 와서야 겨우 쥐의 쓸모는 저 실험실에서나 발견되고 있긴 하지만.
한 남자가 쥐를 잡겠다고 나섰다. 자발적인 것도 아니고 본인도 역시 쥐를 무서워하지만 기세 등등한 아내에게 등떠밀려 쥐가 사는 부엌에 갇혔다. 그는 천하태평 달국씨. 두부김치와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며 행복하다고 말하던 그 달국씨다. 그는 정말 행복한 남자인가, 이야기를 읽다 보면 그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나이다.
멀리 재개발이 이뤄지고 있는 뉴타운이 내려다보이는 산동네 가난한 집에서 살아가는 남자. 오토바이 사고로 다리를 다치고나서 이제는 막노동판에서조차 일거리를 얻지 못해 어디로도 갈 곳 없어 하릴없이 술잔이나 기울이는 그런 남자다. 식당 설거지로 돈 벌어 오는 아내에게 얹혀 사는 모양새니 아내는 구박과 잔소리가 늘고 귀여운 딸아이는 자신을 멀리하는 것 같다.
소설은 아내의 잔소리가 점점 늘어갈수록 긴장감이 고조된다. 점점 화가 치미는 달국씨가 뭔 일을 치르진 않을까? 소주 병나발을 분 다음 병을 마당에 던지진 않을까? 분을 참지 못하고 아내에게 손찌검을 하는 건 아닐까? 조마조마해하면서 읽어가는데 그럴 정도로 포악한 남자는 아닌 모양이다. 게다가 아내가 부엌에서 쥐를 잡아달라고 하자 순순히 등떠밀려 부엌까지 들어가기까지 한다. 아내가 슈퍼에 간 다음 적당히 농땡이 부리다가 쥐가 도망갔다고 하고 나갈 참이었는데 … 그는 결국 쥐를 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변하게된다.
쥐를 잡는 과정이 실감나게 묘사되면서 또 한번 긴장감이 고조된다. 쥐를 잡을 수 있을 것인가?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쥐가 찬장 꼭대기에 버젓이 앉아 달국씨를 내려다보며 ‘병신’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환청이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다. 이미 달국씨는 이성을 잃었다. 쥐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쥐 한마리 잡기 위해 부엌은 난장판이 된다. 보잘것 없지만 얼마 없는 살림조차 다 부서지고 만다. 결국 달국씨가 쥐를 잡긴 잡았는데 그건 과연 잘된 일인지 … 딸 영미가 맞닦뜨리고 오줌을 지릴만큼 끔직한 아버지의 몰골, 쥐의 피를 가득 뒤집어쓰고 흰자위만 드러낸 얼굴, 그 ‘얼굴에 주름주름 각인된 공포’는 앞으로 그 가족에게 어떤 삶을 안겨줄지 걱정스러워진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부엌에 서식하는 쥐와 달국씨가 결국 비슷한 존재 의미로 다가온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 한 걸까? 그가 잡은 것은 쥐인가? 무엇인가? 이미 죽어 물컹해진 쥐의 사체를 계속 계속 내려치는 달국씨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 것인가? 그 모든 의문들을 독자의 것으로 남겨두기 위해 소설 전개가 영미의 시선으로 옮겨간 것은 잘 한 것 같다. 이것이 마지막의 공포를 더 배가시키기 때문이다. 달국씨의 공포가 이미지화 된 마지막 장면이 오래 뇌리에서 안 잊혀질 것 같다.
다른 리뷰어분이 쓰신 것처럼 <운수좋은 날>의 김첨지가 생각나기도 한다. 그 시절로부터 아주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가난한 가장들의 비극적인 상황은 여전한 모양이다. <배따라기>에서 쥐 한마리 잡으려다 가족이 풍비박산 난 경우도 보았기 때문에 쥐를 잡으라고 할 때부터 뭔가 불길한 예감은 없지 않았으나 또 그와는 다른 소설이다. 마지막 장면은 왠지 엘런 포의 <검은 고양이>를 읽을 때와 같은 느낌도 없지 않다. 원래 잘생긴 사람은 이 사람 저 사람 다 닮은 것 같은 법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만의 독특함이 분명히 있고 술술 잘 읽힌다.
이미 오래전부터 올려져 있던 작품인데 이제서야 발견하고 리뷰 하나 추가해본다. 나처럼 아직 발견 못한 독자들도 있으리란 생각에. (리뷰가 뜨면 메인에 뜨기 때문이에요. 다른 의미는 아닙니다.) 좋은 소설은 더 많이 계속 읽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