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구를 믿게 하는 힘은 어디서 오는가 비평

대상작품: 형광등보기 (작가: 김병식, 작품정보)
리뷰어: 라이트, 3시간 전, 조회 4

이 소설은 ‘형광등보기가 어떻게 우리나라에 정착했고 전통문화로 자리매김했는가’를 학술지 형식으로 시작합니다. ‘형광등보기의 기원과 역사’라는 부제부터가 묘한 의구심을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합니다.

 

문체는 철저히 학술 논문이나 백과사전처럼 구성되어 있어, 글을 읽는 내내 역사적 사건과 주요 인물을 의심 없이 믿게 되는 묘한 블랙홀에 빠져드는 느낌을 줍니다.

 

기록, 일천야담, 안재천, 매일신보, 신여자, 1920년대 조선일보 기사, 김동리의 『무녀도』, 소설가 김창섭의 회고록, 심지어 『전원일기』의 소재로 사용되었다는 언급까지— 절반은 사실이고 절반은 허구인지라 독자를 거의 현혹시킵니다.

 

현실의 연도, 인물, 건물 등과 엮인 대체 역사 설정이 매우 사실적으로 설계되어 있어 읽다 보면 진짜 있었던 것처럼 착각이 드는데 이 정도면 말 다했다고 봅니다.

 

이렇듯 첫 번째 이야기는 점점 읽는 이의 뇌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은 다음, 형광등보기가 실제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스스로 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오히려 즐기게 되는 묘한 쾌감도 뒤따릅니다.

 

그러다 갑자기 등장하는 ‘어느 광막자의 일기’에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광적으로 VR챗에 몰입해 사는 남자가 나옵니다. 그의 등장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고 서서히 최극단까지 올라가다 갑자기 휙 내려오는 느낌을 줍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인간관계도 원만하지 못한 자신을 직시하고, 자신의 기술을 이용해 가상세계에 새로운 세계를 만들며 현실을 회피합니다. 그 속에서 자신만의 천국을 구축하던 그는 버그로 인해 디지털 세계가 일그러지기 시작하면서 빛을 봅니다. 그 빛은 단순한 기계의 오류였지만, 그는 그 오류 속에서 진리를 발견합니다.

 

이야기는 디시인사이드 마이너 갤러리에 1회성으로 연재된 글을 화자가 복사해 다음 글을 기다리지만 갤러리는 폐쇄되었다는 이야기로 끝나며, 이후의 이야기는 독자의 상상에 맡겨집니다.

 

이 소설은 제 지력을 시험하고 뇌를 뜨겁게 달구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내용은 이야기를 다 읽은 후 바로 떠오른 생각들로, 일체 가감 없이 마무리로 갈음하려 합니다.

 

첫째, “낯설게 하기”

이 작품은 형광등을 낯설게 하기를 빌어온 소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익숙한 사물을 낯설게 함으로써, 독자의 인지에 미묘한 균열을 일으키고 점화효과를 유도합니다.

둘째, 믿음의 기제

읽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즘 세상, 가짜뉴스가 얼마나 사람을 쉽게 믿게 만드는지. 잘 짜인 글, 그럴듯한 문체, 익숙한 어조… 사람의 뇌는 그런 것 앞에 쉽게 굴복합니다. 이 소설은 그런 믿음의 기제를 거울처럼 비춰줍니다. 존재하지 않는 풍습을 실재처럼 느끼게 만들고, 그 믿음을 독자가 어떻게 따라가는지를 보여줍니다. 믿음이 설득의 기술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을 새삼 생각하게 됩니다.

셋째, 바라봄의 실체

형광등이라는 사물을 통해 ‘바라봄’이라는 행위 자체를 독자가 사유하도록 이끄는 점도 인상적입니다. 형광등이 단순한 물체를 넘어서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는 매개로 다가오게 만듭니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 있는가, 그리고 그 ‘보는 행위’가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되묻습니다.

 

덧붙여, 황당한 상상

 

덧붙여 황당한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혹시 이 소설을 계기로 ‘형광등교’ 밈이 나오는 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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