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혐오에 대한, 덜 전문적이지만 세심한 관찰기. 감상

대상작품: (작가: 이도건, 작품정보)
리뷰어: 태윤, 5시간 전, 조회 5

이 작품은 적은 분량과 술술 읽히도록 문장의 배분까지 신경 써주신 작가님 배려 덕분에 10분이면 읽을 수 있는 짧은 단편입니다.

단편 소설이 보여주는 압축과 절제의 묘미를 너무나 사랑하는 저로서는 이 작품을 추천해드리지 않을 수 없네요.  브릿G의 독자 여러분들도 작지만 멋진 것들이 가득 담긴 단편의 매력에 빠져보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이야기는 아주 단순합니다. 화자이자 주인공인 나는 집에서 조그만 벌레를 발견한 이후로 그 벌레에 대한 생각을 머리에서 떨쳐낼 수 없게 됩니다. 모두 한 번 쯤 겪어 본 적이 있을 거라 예상됩니다만, 집에 개미가 한 마리 나오면 바닥이나 천장 어딘가 개미 몇 만 마리가 오손도손 살고 있는 왕국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자다가도 벌떡 벌떡 이불을 걷어차게 되지 않습니까? 나 또한 그런 불안감 때문에 보통 우리가 해보는 방식들로 마음의 가려움을 없애 보려고 하지만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보통 그런 벌레들은 번식력이 뛰어나고 군집을 이루고 살며 그 벌레들에게도 생존이 걸린 일이라 아마추어 사냥꾼에게 쉽게 잡혀주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잊을 만 하면 또 발견되고 자신의 생활에 불편을 주는 벌레 때문에 나의 생활은 점차 흔들리고 무너져가게 됩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덩달아 생긴 호기심에 좀벌레, 흔히 좀이라고 부르는 녀석에 대해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흔히 ‘좀이 슬다’, ‘좀이 쑤시다’ 라는 표현을 쓸 때의 ‘좀’이 바로 좀벌레인데 곡괭이 같이 생긴 꼬리가 양갈래로 뻗어있는 모양이 그다지 귀엽지 않은 길이 10mm 내외의 작은 곤충입니다. 조금 의외였던 점은 썩 좋지 않은 평판에 비해 인체에 아주 큰 약영향을 주는 해충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주로 오래된 나무를 파 먹고 사는 이 녀석들은 관리가 안 된 의류나 침대 매트리스에 살기도 하는데 벼룩이나 빈대처럼 사람의 각질이나 피를 먹지도 않고 사람을 잘 물지도 않으며(벼룩이나 빈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뜻입니다) 특히 전염병을 옮기는 매개체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생김새를 보면 위에 기술한 모든 악행을 혼자 다 해낼 것만 같은 외계 생명체 같은 모습에 움직임도 상당히 빠른 편입니다. 자세히 봐야 알 수 있긴 하지만 그 생김을 보면 가장 먼저 드는 느낌은 아마도 혐오일 겁니다.

집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에서 그런 끔찍한 생명체를 발견한 주인공은 점차 그 생명체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됩니다. ‘좀벌레라는 더러운 생명체가 나온 집’ 과 ‘그 집에서 사는 나’ 나 결합되어 ‘더러운 생명체와 함께 있는 나’가 되는 과정으로 보입니다. 혹시라도 경험이 있으신 분이 계신다면 잘 아시겠지만, 이런 과정으로 생긴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좀벌레 같은 해충들이 쉽게 박멸되지 않는다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지만, 사실 진짜 문제는 나의 집에서 좀벌레가 모두 사라졌다 해도 머리 속에 한 번 들어온 불안감이라는 벌레는 쉽게 나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주인공이 벌레를 보면서 느꼈던 혐오라는 감정 때문에 더욱 커지게 됩니다. 자신이 벌레에게 느꼈던 혐오라는 감정이 자신과 벌레가 동일시됨으로 인해 나를 향하는 화살이 되었으니까요.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거듭하던 나는 종국엔 이 지독한 벌레가 자신을 떠나지 않을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문맥상으로는 이미 나의 머리 속을 깊이 파고든 자기 혐오와 강박, 불안 같은 감정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측이 되지만, 생각해보면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실제로 한 번 생긴 좀벌레는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영화의 쿠키 영상처럼 남긴 작가님의 마지막 문장에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겪게 되는 문제는 말 그대로 현실의 문제입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업무 생활이나 나만 모두와 멀어져가는 듯한 인간 관계, 제자리 걸음만 계속하는 것처럼 보이는 내 모습에서 우리는 옷장에 있는 좀벌레 같은 뭔가를 찾게 되는 것 같습니다.

원인도 없고 뚜렷한 해결 방법도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계속 옷을 세탁하고 방을 청소하고 계속해서 입고 있는 옷이나 몸을 점검합니다. 당연하게도 그러면서 우리는 지쳐가게 됩니다. 이 작품은 스스로에게 ‘좀’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 사람이 무너져가는 과정을 매우 짧고 그렇지만 명료하게 표현한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가독성이 매우 좋습니다. ‘짧으니까 당연한 거 아닌가?’ 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분량이 적다고 모든 작품이 술술 읽히는 건 아닙니다. 이것이야말로 웹소설의 형태로 글을 전달하는 현대 작가님들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라고 생각되는 글의 분배입니다. 이 작가님이 쓰시는 장편이 매우 기대가 되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이런 기술을 가진 분이라면 장편에서도 뛰어난 가독성을 보여주실 거라고 생각되거든요.

자기 혐오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안 해도 되는 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저는 제 몸에서 냄새가 난다는 강박에 빠져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문제는 제 출퇴근 경로에 20분 이상의 도보, 지하철, 버스가 모두 있는 상태였다는 겁니다. 특히 여름엔 20분 정도 걷다가 땀을 흘린 상태로 지하철을 타고 30분 정도를 이동한 후 내려서 다시 버스를 타야 합니다. 지하철을 타면 그 칸의 모두가 저를 보며 인상을 찡그리는 것 같았습니다. 제 주위엔 사람들이 다가오지 않았고, 오히려 제 곁에 앉아있던 사람이 자리를 포기하고 일어서는 걸 본 적도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지하철에서 핸드폰을 보다가 우연히 창에 비친 제 얼굴을 봤는데, 평생 그런 적이 없었다고 생각될 정도로 인상을 쓰고 있었습니다. 마치 고전 소설에 잉크로 그린 삽화 속 악마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걸 본 이후로 제 몸에 붙어 있던 ‘좀’을 떼어내려고 노력 중이고 어느 정도는 효과가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땀을 흘리다 지하철을 탔으니 제 몸에서는 땀 냄새가 날 겁니다. 냄새에 예민한 사람은 제 곁에 있기 싫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제는 그런 이유로 제 몸에 좀을 키우진 않으려고 합니다. 어차피 잘 안 없어지는 벌레이기도 하고 병을 옮기는 녀석도 아니라고 하니까요. 독자 여러분들도 불안과 강박, 자기 혐오라는 먹이를 주면서 내 몸에 좀을 키우는 일은 없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시원한 장소에서 수정과 한 잔 드시면서 [좀]과 같은 재미있는 소설 한 편 읽으시면 효과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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