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문응원에서도 쓴 바가 있지만, 이 소설을 다 읽고 난 뒤에는 가수 한동근 씨의 노래 <이 소설의 끝을 다시 써보려 해>가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있었던 후회나 잘못을, 그때로 돌아간다면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물론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 역시 알고 있지요. 시간을 역행하는 일도 불가능하거니와, 그 순간으로 돌아간들 그때의 선택이 우리에게 최선이었음을 깨달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작가라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작가가 쓰는 대부분의 이야기는 결국 자신의 투영입니다. 인생의 주요한 사건이든, 사회에 대한 시선이든, 자기 정체성의 일부이든 말이지요. 저 역시 몇몇 이야기에는 꽤 노골적으로 자신을 투영하곤 합니다. 특히, 투영된 것이 제가 겪은 사건일 경우 이를 비틀곤 합니다. 제가 원했던 과정과 결과로 이어지게끔 말이지요. 하지만 권선율 작가님의 <계류>는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인지 되묻고 있습니다.
‘계류’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세 가지 한자어가 검색되고, 권선율 작가님의 <계류>에는 아마 繫留가 쓰였다고 쉬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맬 계, 머무를 류.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두고, 머물게 한다는 뜻이지요. 실제로 작중 인물들은 자신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해빈은 청각 장애를 얻으며 서서히 청력을 상실합니다. 영주는 해빈에게 접근해 친해집니다. 해빈은 영주의 집에 초대를 받지만, 자기 집과 그곳 사이의 대비에 사로잡힙니다. 영주는 뱃속의 아이를 잃은 순간에 묶여 있습니다. 순간, 영주는 자신과 같은 고통을 해빈은 모를 것이라 말해버립니다. 해빈은 영주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지 않습니다. 영주의 서운함에, 해빈은 영주에게 내가 너에게 뭔데 이러냐고 말합니다. 해빈과 영주는 그 이후로 서로를 마주치지도 못합니다. 그 모든 처음부터 끝까지, 해빈이 매일 만나는 검은 개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해빈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해빈은 자신이 사랑했지만, 지금의 남편은 아닌 남자가 썼을 소설에 대해 생각합니다.
‘나’는 사촌 여동생의 결혼식을 촬영하러 간 날에 엘라와 만납니다. 둘 사이는 미묘한 기류가 흐릅니다. 엘라는 언젠가 ‘나’에게 길을 잃은 것 같다며 전화를 걸었던 적이 있습니다. 엘라는 이미 사랑하는 남자가 있으면서도 ‘나’와 함께합니다. ‘나’는 직감합니다. 이 순간에 묶인 채, 이대로 살아가겠구나. 엘라는 한국을 떠나기 전, 자신이 사랑한 한국 남자가 죽기 위해 스위스를 찾았던 거라고 고백합니다. ‘나’와 엘라는 소설 쓰는 이야기를 주고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크고 검은 개가 나오는 사랑 이야기. 이윽고 엘라가 먼 객지에서 칼부림에 당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무너집니다. 무너진 채로, 어쩌면 평생, 이대로 머무를지 모르겠지만.
두 개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교차하는 <계류> 형식적 특징은 일견 액자식 구성의 이야기 같습니다. ‘나’와 엘라의 이야기가 외부 이야기고, 크고 검은 개가 등장하는 해빈과 영주의 이야기가 내부 이야기처럼 보이지요. 하지만 이야기를 전체적으로 다시 읽고 보면 단순한 액자식 구성과는 다른 인상을 줍니다. 내부 이야기에서 크고 검은 개가 등장하는 근거가 ‘나’와 엘라의 이야기에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나’와 엘라의 이야기가 해빈과 영주의 이야기를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형식적으로 보았을 때 <계류>는 같은 주제를 다루는 두 개의 연작 작품, 즉 변주를 엇갈려서 동시에 배치한 것에 가깝습니다. 이를 통해 독자는 내용상으로는 몰입할지언정, 형식적 특징으로 인해 계속해서 소격효과를 겪게 됩니다. 특히 ‘나’와 엘라의 이야기가 시간 배치의 관점에서도 뒤섞여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이러한 구성으로 얻을 수 있는 최종적인 효과는 무엇일까요. 독자는 몰입에서 벗어남으로써 두 이야기를 보다 오랫동안 곱씹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두 이야기를 객관적인 관점에서 비교하게 됩니다. 두 이야기에서 동일시되는 여러 인물과 상징의 관계를 파악함으로써, 두 이야기 사이에 바뀐 게 거의 없음을 알게 됩니다.
<계류>는 제목의 뜻인 ‘묶여서 머무름’에서 살짝 더 나아가, ‘바꿀 수 없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작가가 아무리 자신이 겪었던 일을 재구성하고, 결말을 바꾸어보려 해도 이는 쉽지 않고, 오히려 실패할 가능성이 큽니다. 사람의 상상력은 무궁무진하다고 하나, 결국 자기가 경험한 것 이상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나’나 엘라가 소설을 쓴다고 해도 해빈과 영주는 다시 만날 수 없습니다. ‘나’가 사랑했던 엘라를, 엘라가 사랑했던 남자를 다시 만날 수 없는 것처럼요.
그렇다면 작가는,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것을 절대로 극복할 수 없는 것일까요. 실패한 사랑을 겪은 이는 실패한 사랑밖에 할 수 없고, 실패한 사랑 이야기밖에 쓸 수 없는 것일까요. 잠깐 딴 이야기가 될 수 있겠지만, 뮤지컬 <하데스 타운> 이야기를 해봅시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비극적인 사랑은 뮤지컬에서 근현대적으로 재해석되지만, 그렇다고 결말까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의 마지막에서, 비극의 반복이 무의미한 것만은 아님을 암시합니다. 이러한 암시는 <계류>에도 있습니다.
끊임없이 실패하고, 끊임없이 발버둥 치고, 끊임없이 다시 실패하는 것. 그것은 분명 우리를 피폐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삶마저 차마 계류할 수 없는 것은 저 너머에 닿고자 하는 것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계류(繫留)하는 삶은, 부단한 반복과 변주를 통해 계류(稽留)하게 할 것이고, 끝내 새로운 지평으로 나아가는 계류(溪流)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치지만 않는다면요.
반복되는 실패에 묶여 벗어날 수 없고, 그것이 의미 있는 일인지 숙고하게 만드는 이야기였습니다. 좋은 이야기를 써주신 권선율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